신 승 철
단국대학교 치과대학 명예교수
해마다 성탄 무렵이면 TV에서 늘 방영하던 프로가 있다. 옛날에는 “벤허”나 “십계”였는데 일 이십 년 전부터는 성탄 전날에는 “호두까기 인형”이고 성탄 당일에는 “나 홀로 집에”이다. 그리고 연말이면 어김없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가 합창과 더불어 방영된다.
몇 년 전 대학에서 은퇴를 몇 달 앞두고, 마지막 박사학위를 지도했던 여자 대학원생이 연말에 교수님 부부와 꼭 한번 음악회를 가고 싶다며 예술의 전당에서 웅장하게 공연하는 “환희의 송가” 티켓을 한 달 전부터 어렵게 예매하여 끊어 놓았으니 ‘꼭 해당 날짜에 늦지 말고 오셔서 입구에서 만나자’고 했다. 집안은 부유했으나 돌싱인 아픈 경험이 있는 것을 알기에 박사학위 축하 겸 가기로 했다. 연말이라 교통이 막혀 가까스로 시작 몇 분 전에 공연장 입구에 도착하여 표를 받고 보니 내가 예상했던 것의 수십 배나 되는 액수가 인쇄되어 있는 로열 석 이었다. 당시가 한창 부정금품수수방지법이 통과된 시점이라 내가 곤란하다고 입장을 망설이자 “제 티켓은 싼 좌석 쪽이기에 그걸 교수님에게 드린 것으로 할게요”하면서 우리 부부 자리를 안내해주고는 “잘 감상하고 가세요!” 인사하고 자신은 다른 층 싼 좌석 쪽으로 급히 가버렸다. 둘러보니 주위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상당한 사람들 같았는데 간혹 화면에서 보던 유명 인사 분들도 눈에 띄기도 하였다. 공연이 시작되자 춥고 막힌 겨울 길을 힘겹게 달려온 탓인지, 푹신한 의자와 따뜻한 분위기에 빠져 졸음이 쏟아졌다. 다행히도 중간에 10분간 휴식시간이 있어서 쉬려는데 곁에 앉은 집사람이 보채었다. “나 배고파.” 공연 끝나면 식당 문도 다 닫을 것이라는 예상 하에 그만 나가서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2부 공연을 포기한 채, 모차르트 식당으로 가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이태리 음식을 하나씩 먹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학교에서 만난 그 여 제자가 물어왔다. “어제 공연 어땠어요?” 난 주저 없이 대답했다. “아주 좋았어, 특히 2부에서 환희의 송가 합창은 환상적이었어.” 나를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던 그 여 대학원생은 소리쳤다. “뻥치지 말아요, 사모님이 배고파 하니까 두 분 다 얼른 식당으로 나갔고, 2부에는 안 오셨잖아요?” 그러면서 “교수님 부부 바로 옆 좌석 할머니 두 분이 저의 엄마와 이모였어요” 한다. 급히 웃으며 사과 했지만 쉽게 분이 안 풀린 것 같았다. 후일 필자가 30여 년째 지도교수를 맡고 있던 치대 관현악단 모임에서도 이 이야기가 돌았던 걸 보면 이 친구가 퍼트린 모양이다. 어느 치과대생은 관현악단 회식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물어왔다. “슈베르트는 가난해도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음악을 못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는데, 교수님께서는 한 끼 배 고품을 해결하려고 베토벤 명곡 환희의 송가도 포기 하셨다면서요?” 그래서 씁쓸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지.”
하기야 십년 전 쯤 폭설이 내리던 이른 봄, 미국 학회 발표로 대학원생들이랑 뉴욕엘 갔는데, 그들이 뉴욕에서 꼭 보아야 한다며, 브로드웨이 극장가에서 한 장에 거의 20만원씩이나 하는 “오페라의 유령” 티켓을 끊어와 함께 관람하는 행운을 얻었는데, 낮에 학회에서 긴장하며 시달리던 몸이 따뜻한 실내에서 녹아내리며, 공연 시작 5분도 안되어 쏟아지는 졸음에 깜빡깜빡 졸고 말았다. 그러다가 천둥치며 벼락 떨어지는 장면에 잠깐 눈을 떴다가는 곧이어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곁의 대학원생들이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어렴풋이 눈을 뜨니 관중들 모두가 내 쪽을 바라본다. 내가 코를 너무 심하게 골았었나 보다. 공연 끝나고 나오는데 동양인은 우리 몇 사람 밖에 없었기에 모두들 고개를 푹 숙이며 도망치듯 극장을 빠져나왔다. “다시는 교수님과 공연 안 간다.” 한동안 이런 풍토가 우리 교실에 있었는지 그 후로는 아무도 나랑 공연 보러 가자거나 극장 가자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30여 년 간 치과대학생들과 관현악단 공연도 많이 해봤지만 내가 공연 할 때는 결코 조는 일이 없는데 남이 하는 걸 들을 때는 그냥 지겹고 졸리운 것은 좁은 의자에 장시간 앉아 있기 때문일까? 올해도 연말이 되니 어김없이 추억의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고 있다.
http://www.chihak.co.kr/news/12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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