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고귀하고 무조건 존중받음이 마땅한 개인의 자아
자존감이 도를 넘어 강조되고 숭배되는 전반적 사고방식
김 용 호
김용호 치과원장
지금 여기 우리들, 21세기 지구촌 거주자들은 언제부터인가 정의와 불의, 선과 악에 대한 경계가 불분명한 시대가 되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도시라는 좁은 공간에 밀집하여 살아야만 하는 현 인류의 공동체의 물리적 형태는 최소한의 준법과 희미한 결속에 의지하여, 그저 당장 폭발하거나 해체되지 않을 수준의 질서로 유지되어오고 있는 형편이었고, 그 모듬살이 마저도 COVID-19의 위협으로 모진 시련을 겪고 있다. 속담과 동화를 통해 온세상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쳐오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어요’의 교훈은 다소 내용이 달라져 ‘뭉치고 모이긴 하되, 그 안에서 일등이 되거나 적어도 상위그룹에 합류해야 살아요’라는 가르침으로 바뀐 것은, 1930년 약 2억이던 지구촌 주민수(세계인구)가 지금은 78억(2021년 U.N.)이 넘었으니, 예전처럼 서로 힘을 모아 자연에 대항하고 서로의 생존에 도움이 되던 시절은 가고, 사람이 많은 것이 서로의 생존에 고단함을 유발하는 시대에 맞춰진 새 속담인가 싶다. 무릇 사람이 많으면 더 큰 힘이 모아지고 더 많은 즐거움이 생겨나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담아낸 새 속담에 익숙해져 무심코 지나쳤지만 곰곰 생각해 본다.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읽어보며 가지게 된 누더기 같은 생각이지만, 서양사의 시각으로 근대가 시작되어 무르익는 20세기 초, 모멘텀이 붙은 산업혁명과 자유주의 사상, 그 기저에 자리잡고 있던 개인적 행복추구와 욕구실현의 과정에서, 이전의 시대에선 그저 왕과 귀족들이 배타적으로 누리던 것들이 평범한 이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싹텄다. 이어 개인의 권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지구촌 가득히 드높아지며, 그러한 개인의 행복과 만족감을 무한히 중요한 가치로 떠올리고, 그것을 휴머니즘이라는 고상한 색깔의 포장지로 감싸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 참인 명제로 숭상하며 열광하는 사조가 현 지구촌의 시대정신이라고 대충 정리해 본다. 이 ‘스스로 고귀하고 무조건 존중받음이 마땅한 개인의 자아’에 대한 시대정신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인들의 위선적 구호와 이윤추구에 무한히 몰두하는 자본가들의 화려한 장터 광고에서 백 년이 넘도록 이용되는 단골 문구인데, 더 안타깝고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경과 속에서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의무와 책임의 당위에 대한 자조와 그러한 구성원의 육성이라는 지루하고 수고로운 노력은 모두의 무관심 속에 외면당하고 잊혀져,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묻어버린 느낌이다.
지구촌 주민들은 왕정과 봉건제도, 독재체제 등으로 얼룩진 과거의 사건과 그 기억들에 워낙 큰 혐오감을 갖는 터라, 개인의 가치보다 전체의 가치가 너무 소홀해졌으니 생각들 좀 해보자는 식의 얘기를 꺼내면 주변 시선이 곱지 않아지고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므로 영리한 이들은 그런 얘기를 화두로 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와 미국 National Press Club과 유수의 국제단체들로부터 공로를 인정받고 여러 번의 수상자로 선정된 언론인이자 작가인 윌 스토(Will Storr)는 ‘우리가 우리자신에게 어리석게 사로잡혀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부제의 저서 “SELFIE”(2017)에서 설득력 있는 시각과 논리로 근,현대 지구촌 주민들의 과도한 자존감과 그 개인적, 사회적 역기능에 대해 차분히 비판한다. 그는 20세기초 대공황 이후 어둡고 침체된 사회분위기를 일신하려는 칼 로저스와 같은 심리학자들의 움직임으로 미서부 캘리포니아의 에설런 연구소에서 시작된 ‘자존감운동’이 정치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1990년대의 심리학은 물론 교육학과 사회문화적 사조의 코어로 자리 잡으며, 자존감의 중요성이 도를 넘어 강조되고 숭배되는 전반적 사고방식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사실과 관련 연구들을 바탕으로 이야기한다. 그러한 자아에 대한 과감한 변화의 물결은 사랑받는 아이에게 또는, 다 큰 어른들 간의 우호적 대화에서 흔히 들었던 “너는 매우 특별한 아이야!” 또는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요!” 식의 메시지로 전달되었고, 현재의 지구촌 구성원들의 personality 속에 스며들고 새겨져 왔다고 전하며, 우리가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종종 조우하는 병적인 개인주의가 시작된 시기와 과정에 대해 Storr는 흥미롭게 이야기들을 펼쳐낸다.
공동체와 구성원의 관계를 개념정의한 것들 중 필자가 가장 인상깊게 기억하는 말을 발견한 것은, 어린 시절 친구 같은 늑대소년 ‘모글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키플링作 ‘정글북(1894)’이라는 동화 속에서였다. 작품마다 표현이 약간씩 다르지만, 정글에서 모글리를 키워준 늑대의 무리들이, 정글의 규칙을 어기며 인간을 해치는 不義와 惡의 표상인 시어칸에 맞서기 위해 대책을 논의하던 중, “무리의 약속은 늑대의 힘이고, 늑대의 약속은 무리의 힘이다”라는 말로 뜻을 뭉치는 장면이 나온다. 어느 작품에서는 “늑대의 힘은 무리이며, 무리의 힘은 늑대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누구나 지키는 규칙을 대놓고 어기며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적을 향한 결집과 연대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마음가짐에 대한 최고의 어록임에는 틀림이 없다.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은 40대에 역대 최연소로 노벨문학상(1907)을 수상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일부 작품과 생전의 행보에서 비판받는 부분도 있지만, 인도 뭄바이 태생으로 유년기부터 영국에서 교육받고 성장하여 인도로 다시 건너와 언론사에서 일하며 여러 이유로 미국, 아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다양한 사회와 문화 속에서 폭넓은 정체성과 섬세한 감수성이 더해져, ‘남다른 관찰력과 독창적인 상상력에 비범한 서술의 재능이 갖추어진 작가’라는 노벨상 시상자들의 평가에서 그의 상황에 대한 직관력과 전체를 보는 통찰력은 인정해 볼만하다. ‘정글북’에서 유년기 독자들에게 모글리는 모험심과 용기로 다가가지만, 청소년기의 독자들에게는 정글과 인간세계 어느 한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周邊人)으로 공감되는데, 이는 지금의 지구촌 주민들이 가지는 불안감과 상실감의 느낌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무려 130년 가까이 세계 동화계의 베스트셀러 지위를 지키고 있는 이 작품에서, 어려운 이 시대에 지구촌 주민들과 커다란 함성으로 외치고 싶은 말이 떠올라 불법으로 표절해 본다.
http://www.chihak.co.kr/news/16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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