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흥 우
李興雨齒科 院長, 哲博
30년 지기 막역한 동생이 ‘점심 먹자’고 카톡이 왔다. 여러 번 함께 식사했던 친한 동료도 동행한다며 맛집까지 선정했다고 한다. 주안사거리 근처, 선친이 사시던 동네의 식당이다. 재개발이 진행되는 터라 주차가 마땅치 않을 것이라는 문자를 미리 받았건만, 막상 주차하려니 여의치 않아 30분을 이리저리 헤맸다.
공사 중인 구역은 골목 행인을 보호하려고 함석판으로 둘러싸여 전혀 여지가 없고, 길 건너 공영주차장도 꽉 차 있어 교회 주차장까지 기웃거리다가, 마침 길가 하역하던 트럭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얼른 차를 끼워 넣고 식당으로 한참 걸어 내려갔다.
냉면을 시켜 먹는 중에 모르는 번호가 스마트폰에 떴다. 어서 차를 빼달란다. 식사 후 곧 가겠다고 사정을 하고, 먹는 둥 마는 둥 때마침 내리는 비에 우산을 빌려 차까지 걸어갔다. 스콜처럼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다음 코스로 찾아놓은 카페로 차를 몰고 갔다. 건너 받은 주소를 네비로 찾아가니, 재개발 중인 동네의 한가운데에 있다. 이곳까지 개발되려면 꽤 시간이 걸리겠다. 그래선지 아직 주택 여러 채가 옹기종기 옛날처럼 그대로 남아있다.
10여 평 앞마당 뜰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장승처럼 양옆에 우뚝 서 있고, 뒤채에 카페가 아담하게 2층으로 있다. 골목이지만 뜰 앞에 차 3대라도 비집고 댈 수 있게 주차 공간이 있다. 폭우 속에 몇 차례 앞뒤로 왔다 갔다 주차하곤 커피집에 들어갔다. 실내장식이 현대적이고 마당 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우렁차서 기분이 좋다. 한숨 돌리고 위층까지 현대식 인테리어를 둘러 본 후 아래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인장은 인테리어 사업자였는데, 은퇴 후 소일거리 겸 카페를 하려고 이렇게 꾸몄다 한다.
이 동네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주말마다 늘 왔다 갔다 하던 곳이다. 삼십 년 전만 해도 이런 작은 저택들과 연립주택들은 꽤 괜찮은 신식 모델이었다. 부모님께 뜰 있는 집을 마련해드린다는 소망을 품고 있던 터라, 10여 평 남짓의 뜰이 있던 집을 보자마자 단숨에 계약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돌아가신 후, 동네가 재개발된다 해서 팔고 떠났다. 당시 선친의 집 뜰 뒤의 은행나무도 꽤 키가 커서, 가을이면 나뭇가지가 담장을 넘어 연립주택 창살을 들이치는 바람에, 가지 치고 낙엽 치우라는 옆집의 볼멘소리도 한두 번 들었었다.
작은 주택들과 연립주택들이 올망졸망 어우러져 있던 이 동네가 30년 만에 허름한 집으로 변했다고, 벌써 재개발을 하는 동네가 되었다. 하긴 지금 세태로 보아선 이 동네 골목은 자동차가 다니기 비좁고 허름해, 개발업자들은 당연히 사업성 높은 아파트 단지를 권했을 것이다. 대부분 단층집과 간혹 이삼 층의 연립주택으로 지어진 이 구역에, 두서너 집, 여유 있게 푸른 뜰이 있는 곳도 듬성듬성 있다.
1층 카페에서 비 내리는 뜰을 바라보고 있다. 빗소리가 좋다. 푸른 뜰의 물기가 좋다, 두 그루 높이 솟은 나무에 부딪히는 비바람 소리도 좋다. 동네 한가운데 섬처럼 남아있던 뜰 있는 카페에서, 물기 머금은 잔디가 깔린 여유 공간에서, 손님이라곤 우리뿐인 넷이서 넋 놓고 처마에 들이치는 빗줄기를 감상하고 있다. 뜰의 풀을 뽑으시던 부친의 등이 아른댄다. 세상의 온갖 사상(思想)보다도 한순간 쏟아지는 폭우에 모든 게 다 담겨 있다.
재개발할 저 주택들을 처음 지은 60년 전만 해도, 이곳은 염전이 있던 허허벌판이어서 겨울이면 꼬맹이들이 썰매 타러 오던 장소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여기에 보금자리를 지었다간 몇십 년 만에 부수고 또다시 짓겠다 하고, 나는 백 년 전 공터였던 한 줌의 뜰에 앉아 지금 여백을 경탄하고 있다니, 인간이란 얼마나 눈앞에서 사사롭고 긴 시간에 무지한 것인가.
물끄러미 비 내리는 걸 바라보다 깊은 상념에 젖는다. 자연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변하는 과정이 보인다. 자연(自然)의 과정은 개별적인 것에 맞추어 멈추어 서지 않는다. 존재는 자연의 변화하는 과정에 현상으로 있다. 현상으로서의 존재이므로 존재는 변화 자체이고, 그래서 무아(無我)라 할 수 있다. 나는 자연의 부분인 개인으로 있고 또 개인이라서 의미가 있지만, 일즉다(一卽多)로서 전체 자연의 생성·소멸하는 변하는 과정 중에 있는구나!
표현이 적어 살갑지 않단 소릴 건너서 듣던 내가, 모친 생각에 이제 눈물이 난다. 장대비 같은 사랑을 이제야 알다니…. 비가 내린다.
http://www.chihak.co.kr/news/16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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