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승 철
대한예방치과학회 회장
단국치대 교수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라는 말은 십간 또는 천간이라고 말한다. 음양오행설에 근거하여 각 십간 사이에는 상극이 존재하고 계속 윤회하며 그 이치를 논한단다. 더구나 12지간인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라는 띠를 나타내는 말과 조합을 이루어 갑자, 을축, 병인 등으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출생 년 월 일시를 지정할 때 이 십간이 먼저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각 십간 사이에 우선순위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순서를 차례로 갑을병정으로 부를 뿐이란다.
오랜 세월이 지나 요즈음 세상에서는 바로 갑, 을, 병, 정 등이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낼 때 우선순위나, 지위 세력의 고하를 나타내는 대명사로 쓰이게 되는 것이 다소 의아하다. 심지어 한때는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에도 첫째 아이는 갑돌이, 갑순이로, 아들 여럿 있으면 갑식이 을식이 병식이 정식이로 차례로 짓기도 했다. 여자아이라면 갑순이 을순이 병순이 정순이로 나갈 것이다. 마치 갑을병정이 순위를 나타내는 기호인양 모두가 인식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갑을병정은 순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해도 이미 사람들에게는 갑이 을보다는 우선순위임을 다 인지하고 있기에 지금와서 이 개념을 바꾸기는 매우 어렵게 되고 말았다.
대학에서 연구비를 수주 받을 때 용역을 주는 쪽이 정부가 되건 민간 기업이 되건 계약서에는 갑이 된다. 사실 연구를 실시하고 그 연구를 주관하는 쪽은 해당 교수이건만 항상 돈을 주는 쪽이 갑이라고 표현하고 연구비를 받는 대학은 총장도 을로 표시되며 실제 연구를 하는 해당 교수는 병으로 표시하기 일쑤이다.
한 번도 연구자인 교수가 갑으로 계약해 본 적은 없다. 갑을 관계가 서열이 아니고 우선권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딘가 좀 찜찜하다. 내가 담당 교수로서 갑하면 안되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대학의 산학연구단에서 그런 계약서는 양식도 없다고 확답을 내려주었다. 그러니 국가나 기업을 위해 당당히 연구하는 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주눅 들고 때로는 비굴하게 연구를 시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은연중에 서열 매기기를 좋아한다. 사람이 둘만 모여도 은근히 우열을 가리고 여럿 모이면 석차가 결정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소비자는 왕이란 구호까지 만들어 마치 소비자가 갑인양 판매 직원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게 한다든지, 환자의 권익을 우선시 여기다 보니 상대적으로 진료실 직원들의 인권이 을로서 소홀히 되는 경우도 있다. 일등, 이등, 삼등이라고 대놓고 말하기가 거리끼니까 분명히 서열관계 표현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십간을 들이대며 갑을병 관계로 표시하고, 제공자, 가진 자의 갑질을 우려한 나머지 오히려 역으로 갑질 당하는 사례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인간관계, 사회생활에서 은근히 생긴 불평등으로 인한 갑을 관계라는 표현이 생기고 만 것이다. 근래에는 대규모의 매장을 가진 각종 가맹점 점포들에서 본사와 가맹점 대리점 간의 갑을 관계가 사회 문제화 되기도 했다.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피자집 회장님도 사죄하고 사퇴했으며 통닭집 회장님도 물러났다. 어떤 분은 성추문 문제로도 조사도 받는다며 시끄럽기도 한다. 모두가 갑을 관계에서 시작된 불만들의 파생인 것 같다.
치과 분야에서도 많은 가맹점 또는 프렌차이저 등 네트워크들이 존재하는데 이들 조직이 서열 관계를 바탕으로 한 갑을 관계라면 언젠가는 분쟁이 나게 될 것이다.
본점과 지점의 추구 방향이 같고 양자 이득이 되며 서로 간에 동등한 위치에서 맺어진 관계라면 오래 갈 수 있겠으나 한쪽이 우위인 입장에서 갑을 관계 계약이라면 언젠가는 을쪽에서 불만이 터질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갑이란 말을 안 쓰고 처음부터 을로 시작하든지, 갑을을 제비뽑아 결정하든지 하면 해결책이 될까마는, 정부에서도 부정청탁 및 뇌물 방지법을 만들어 뇌물이나 청탁받는 갑쪽의 사람을 처벌한다고 안쓰럽게 을의 입장을 보호하려 하고 있다.
말 안 듣고 뺀질거리는 여 대학원생에게 논문 제대로 쓰라고 혼내주며 잔소리 했더니 그녀의 개인 페이스북 첫 화면에 “교수들 갑질의 끝판은 어디까지인가”라고 쓰여 있다고 다른 대학원생이 나에게 귀띔 해준다. 갑은 아니라고 생각해도 을은 꼴갑질이라 생각한다.
http://www.chihak.co.kr/news/10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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