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흥 우
李興雨齒科 院長, 哲博
몇 년 동안의 코로나 정국과 답답한 정치·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벼르고 벼르다 몇 주를 준비해서 미국 중·서부를 다녀왔다. 차를 2주 임대하여 비숍, 타호호수, 리노, 아말고사 밸리(Amargosa Valley), 데스 밸리(Death Valley), 헨더슨, 조슈아 트리(Joshua Tree), 불헤드 시티(Bullhead City), 세도나,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불의 계곡 등을 차례로 여행하며, 중간중간에 숙소를 잡아 주변을 산책하고 걸었다. 처음 가는 곳도 많아 운전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미국의 드넓은 평원을 차로 다니는 것은 우선 눈앞이 확 트여 있어 가슴이 뻥 뚫어지고 시원해서 좋았다.
데스 밸리 사막에서 듬성듬성 자라는 메스키트 나무 덤불들은 키가 나지막해도 뿌리는 땅 밑으로 깊어 모래바람에도 굳건하다. 생명이 자라기 힘든 곳에서 우리는 생명이 무언지 더 잘 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이 함께 보인다. 생수병을 하나 쥐고 메스키트 플랫 샌드 듄(Mesquite Flat Sand Dunes)의 하얀 모래 위를 한두 시간 걷다 보면, 물이 귀할수록 물을 구하려는 생명력을 땡볕 속의 발바닥에서부터 느낀다. 있다는 것(有)과 없다는 것(無)이 도대체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은지 희미하게나마 느껴진다.
메마른 땅과 물! 일즉다(一卽多), 하나와 여럿, 하나와 또 다른 하나,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이것을 연결하는 것은 사랑이다. 삶과 죽음을 잇는 것은 사랑이다. 죽은 것은 생명을 얻어 살고, 산 것은 사랑을 잃어 죽는다. 사막은 메마르나 바라보면 더없이 아름답다. 지극히 아름다운 것은 또한 성스럽다.
방문객 센터의 소개 영상에서, 예전부터 이곳에 살던 데스 밸리 원주민은 “이 땅이 바로 자기”라고 말한다. 물이 부족하여 생명이 보존되기 힘든 곳에서 그럴수록 하늘의 별과 마른 나무 덤불과 풀을 보며 자신의 생명이 무언지 직감적으로 느끼는 인디언. 내가 왜 삭막하고 황량한 이 데스 밸리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과 사막의 마른 덤불 속에서, 이틀 묵은 숙소 롱스트리트 인에 보존된 오래된 농기구들과 가구들에서, 팍팍한 사막의 삶 속에서도 작은 호수 정원을 가꾼 1900년대 미국 이주민의 열정을 본다. 어느 때 어디서든 유난히 생명력이 강한 이들이 있다. 설령 자연 속의 인간 사회가 한 점 먼지로 사라지더라도…. 드넓은 벌판에서 덤불이면 어떻고, 바위면 어떻고, 하늘을 가르는 저 먼 능선이면 어떠하랴.
우주의 법칙인 ‘일즉다’가 계절 변화 같은 자연의 법칙보다도, 정의 같은 인간 사회의 법칙보다도 우선한다. 그런 우주 역사와 인간 역사가 배경이 되어, 오늘 하루가 모두 내게로 펼쳐진다. 아침에 마시는 공기며 하늘의 구름이 나의 품에 완전히 다가와 안긴다. 내 소유권 등기처럼 거저 다 내 존재 위로 펼쳐진다. 그래서 모든 과거는 오늘 하루에 비견될 수 없는 것이다.
크고 작다는 비교를 떠나, 정확히 말하면 지금 펼쳐지는 현재만 있는 것이다. 좁은 인간 사회에서 벗어나 하늘의 별과 구름과 바람을 느껴라. 분신인 사랑하는 손주에게 돌아가면, 별을 보는 천문대나 광대한 자연으로 함께 여행해야겠다.
인생에선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것만이 아쉬운 것이다. 대상이 자연이든 삶이든. 사회를 위해 뭔가 한다는 어쭙잖은 망상은 버리고, 단지 사랑할 것, 자연과 사람과 인연과 시간을….
여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호텔 창문 앞에 멍하니 기대어 어둑해진 도시의 네온사인을 본다. MGM, 6…. 글자도 사랑스럽고, 붉은색, 푸른색 숫자도 곱다.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의 야간 불빛도 그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여행한다는 것은 명소를 보는 게 아니라, 방 청소하러 들어온 이의 표정에서 제삼 세계의 역사와 그가 처한 가정사를 읽는 것이다. 이른 저녁의 거리에서, 어느 사람의 두 손 뒤로 슬며시 수갑 채우는 여경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시대는 흘러 상영되는 영화의 장면은 세대마다 다르지만, 바람처럼 한번 지나가는 각자의 고유한 관계의 삶을 사는 것, 그 장면의 삶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여행하는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은 내 삶을 여행하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을 귀하게 대하고, 함부로, 일부러, 가볍게 만나지 말 것. 내 길은 정해졌다. 인연이 된 사람들을 사랑하라, 그리고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자연스레 사람들과 사는 곳에서 자유롭게 있으라. 젊어서의 날이나 늙어서의 날이나 모두 같은 날임을 왜 몰랐을까?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일이다.
http://www.chihak.co.kr/news/18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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