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밀레이스가 고두밥의 녹말을 말토스로 가수분해시켜
조 재 오
경희대 치전원 외래교수
엿은 한국의 전통 한과의 하나이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엿기름으로 발효시킨 곡물에서 얻어진 전분에 열을 가해서 진득진득할 때까지 고아 만든 조청이나 엿으로 식생활에 필요한 당분을 얻어 왔다. 원료는 찹쌀, 멥쌀, 옥수수, 조, 고구마 등이다. 엿기름은 보리에 물을 부어 싹이 트게 한 다음 말린 것으로, 가루로 만들어 물과 함께 혼합하여 일정 온도를 유지해 주면 천연 발효제가 된다. 엿기름에 들어있는 아밀레이스가 고두밥의 녹말을 엿당(말토스)으로 가수분해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콩을 붙여 콩엿, 깨를 붙여 깨엿을 만들기도 한다.
묽은 엿은 이(飴)라 하고 된 엿을 당(餳)이라 한다. 좀 더 짧게 설명하면, 졸인 식혜의 굳기 전의 상태를 물엿, 조금 졸인 것을 조청이라고 하며, 바로 굳힌 것을 갱엿(=강엿, 검은엿)이라고 한다. 갱엿을 먹기 좋게 공기를 넣어 뽑아 만든 것이 흔히 먹는 흰엿이다.
필자가 시골에서 살던 어린 시절만 해도 새해를 맞기 전 섣달그믐에 온 마을이 엿을 만들기에 바빴고, 집안의 경사스러운 대소사가 있는 집안에서는 으레 엿을 고으곤 하였었다. 식혜 물을 거르고 졸여서 조청이 되면, 진품 명품에나 나올 법한 귀한 단지에 담아서 밀봉하여 안방다락에 고이 모셔두고 혹시 올지도 모르는 귀한 손님의 대접용으로 간직하였었다. 그러나 엿을 만드는 과정이 몹시 번거롭고 또 힘들어서 지금은 개인적으로 집안에서 엿을 만드는 것은 거의 사라져 버린 풍습이 되었다.
잘 굳은 갱엿은 엄청나게 단단하므로 덩어리라면 둔기로 쓸 수 있을 정도이다. 냉동 보관한 갱엿들은 단단하여 쇳소리가 난다. 갱엿은 대패로 얇게 긁어내어 나무막대에 붙여서 먹거나, 망치로 깨서 작은 조각을 입안에서 녹여서 먹거나, 갱엿을 굳힐 때 물을 조금 섞어서 무르게 만든 속칭 ‘불탱이’로 먹었었다.
약엿이라는 것도 있는데 구기자, 모과 등의 약효를 가진 식물을 우려내어 그 물로 만드는 엿을 말하며 이 엿에 호두, 참깨, 생강, 잣 등을 넣고, 납작하게 편 다음에 대추를 박아 만든다. 지금도 한약방 등에서 볼 수 있으며, 이런 약엿은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오래된 처방법으로, 전문 용어로는 고(膏), 고제(膏劑)라고 한다.
엿을 만드는 재료와 방법에 따라서 다양한 엿이 전해오고 있다, 담양 창평쌀엿은 쌀에서 당을 추출하여 만들어지는 흰 가락엿이다. 이 엿은 다른 엿과 달리 엿 안에 공기구멍이 있어 바삭하게 씹히며 치아에 달라붙지 않는 특징이 있다.
울릉도 호박엿이 있다. 호박엿의 경우 통상의 엿들과는 만드는 방법이 다르고 고소한 맛을 배가시키기 위해 콩가루를 묻혀서 준다. 과거에는 후박나무 진액으로 만드는 후박 엿이었으나 후박나무가 귀해지고 외지인들이 이름을 하도 착각해서 호박엿이 되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는 전통 특산 엿으로 고기가 들어간 고기 엿이 있으며 꿩을 고아낸 꿩엿도 있다. 최근에는 귤과 함께 제주도의 특산품으로 꼽히는 선인장(백년초)을 이용한 선인장 엿도 있다.
북한에서는 개고기나 토끼고기를 엿에 넣는다. 간식보다는 주로 환자의 보양식으로 먹었다.
충청도 지방에는 불린 쌀과 엿기름, 무채를 넣고 만드는 무엿이 있다.
엿은 과거 고려시대 때,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문헌상에서 가장 오래된 엿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며.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도 흰엿과 검은엿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엿은 옛날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그나마 사먹기 쉬웠던 군것질거리였고, 평민들도 접할 수 있었던 길거리 음식으로 엿은 한과들 중 사실상 유일하게 대중화된 한과였다. 엿은 아주 달고 녹으면 끈적거린다. 치아에 쩍쩍 달라붙는 음식의 대명사로서, 수능 등 시험을 치르기 전에 “꼭 붙어라”하는 의미에서 엿을 선물해 주기도 한다. 이는 조선시대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일종의 전통으로 유생들이 과거시험을 보러갈 때 엿을 챙겨들고 갔다고 하며, 과거시험장에서 노점상들이 엿을 수험생들에게 팔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6.25 한국전쟁 이후에는 엿장수가 돈 대신 고물을 받아 되파는 고물상을 겸하기도 했다. 고물을 갖다주면 쇠가위(엿장수가위)로 기다란 엿을 잘라 고물에 알맞은 값어치만큼 주었는데, 사실상 주는 사람 마음이어서 똑같은 고물을 가져다줘도 그때그때 받는 엿의 양이 달랐기에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도 생겨났다.
엿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이용되지만 ‘엿 먹어라’라는 욕설로도 쓰인다. 정작 ‘엿 먹어라’의 어원이 비속어로 쓰이는 된 것과의 연결고리는 찾기 쉽지 않다. 예전 남사당패 은어로 ‘엿’이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말이어서 이 말이 보통 욕이나, 성기나 성교를 지칭하는 비속어와 같은 맥락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래전 필자가 치예과에 재학시절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이는 단체에서 활동한 일이 있었다. 하루는 모임 후 식사 중에 한 여학생이 필자에게 “‘엿 먹어라’가 뭐냐?”고 물어 왔다. 순진무구한 여학생 입에서 이런 비속어(?)가 나왔으니 순간적으로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 답할 줄을 몰랐는데, 마침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짓궂은 선배 한 분이 ‘그건 남자가 아주 사랑하는 여자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여 웃던 기억이 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호호백발의 할마씨가 되었을 그 여학생을 생각하며 가끔 웃음을 짓곤 한다. 지금쯤이면 진정한 엿의 의미(?)를 알았을까?
http://www.chihak.co.kr/news/18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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