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검못해 10년만에 고장난 에어컨 때문 혹서기 훈련(?) 시작
4박5일 고생한 후 모든일은 미리 잘 챙겨야 한단 생각 들어
감세훈
가톨릭대학교 은평성모병원 치과 교수
가톨릭대학교 임상치과학대학원 치과임플란트학과장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그런 것인지, 꽤나 먼 예전의 일 같이 기억이 나는데 불과 몇 주 전이었다. 토요일 새벽에 더워서 잠에서 깼다. 그때까지는 사실 이것의 심각성을 잘 모르고 있었는데 혹서기 훈련의 서막이었다. 덥기도 했는데 에어컨 소리가 좀 이상했는데 소리가 이상하니까 본능적으로 일단 끄고 덥지만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틀고 다시 잠에 들었다.
몇 시간 지난 아침은 역시나 쨍한 햇살과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푹푹 찌는 한여름임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아침에는 밤사이 건물들이 조금 식었던 탓인지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아서 에어컨을 다시 챙겨볼 생각을 못하고, 나도 가족들도 다들 자기 일하러 나가고 한낮이 지나서야 무언가 잘 못됐음을 알 수 있었다. 에어컨 온도를 조절해보기도 하고, 리셋도 해보고, 필터를 청소해서 다시 해보고 해도 찬바람이 나오지 않았다.
부랴부랴 AS신청을 했으나, 한 여름이라 그런지 다음주 목요일 점심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했다. 그나마 목요일 휴가를 내놨으니 고치러 올 때, 집을 지키고 있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혹서기 훈련이 오늘 갑작스레 시작됐다.
이미 자력구제는 실패했고, 어디 대피할 만한 곳이 있을 리는 없고, 선풍기들을 풀로 가동하고 최대한 식구들이 떨어져서 잠을 청해 보는 걸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요일 새벽에 몇 번 깨기는 했지만 그래도 애들은 잘 버티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새벽에 깨서 냉수를 마시고, 다시 잠을 청하기를 반복했다.
애들 데리고 바다라도 다녀오면 괜찮을까 했지만, 이 날은 존경하는 스마일재단 전임 이사장 님의 배우자상이 있는데 문상을 꼭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근무하는 병원 사목회장님의 형제상 장례미사가 있는데 장례미사에 와줬으면 하셨던 원목팀장 수녀님의 연락을 거절할 수가 없었던 터라 어디론가 피서는 불가능했다.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 문상을 갔다가, 구파발로 향했다. 병원에 주차하고 외래로 가면서 평소에 못 느끼던 시원한 병원의 기운에 친구들이 경기가 안 좋아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데서 일하는 게 위안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후에도 푹푹 찌는 날씨는 계속됐고, 집에 돌아와서 어제와 비슷하게 선풍기만 처다 보며,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잠에서 깨는 시간이 알람시간보다 훌쩍 빨라졌다. 하필이면, 이번 주가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의 학원도 방학이다. 목요일까지 어떻게 버티나 싶기도 한데 병원에 따라가자고 하니 안 가겠다고 한다. 다행이랄까? 중학생 첫째는 방학은 아니라 한낮에는 시원한(!) 학원에 서너 시간 갈 수 있으니 가기 싫은 마음과 더위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아마도 복잡했을 것 같았다. 시원한(?) 병원으로 홀로 출근하는 미안함에 빨리 돌아오겠다고 출근을 하고, 퇴근하고 돌아와서는 애들과 같이 해가 질 때까지 카페에 가서 나도 논문 정리랑 일을 좀 할 터이니, 숙제를 하거나 책을 좀 읽고 놀자고 해서 짐을 챙겨서 음료와 간식을 먹으며 해가 넘어가기를 기다렸다. 해가 왜 이리 늦게 지나 푸념하기도 했다. 저녁에 집에서 베란다 구석에 있던 선풍기를 한 대 더 찾았다. 조금 나아지려나?
또 다른 하루도, 어제와 비슷한 날씨의 연속이다. 시원해질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아내와 주말에는 명색이 휴가이니 어딜 좀 다녀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10년 가까이 성실히 일해준 에어컨이 목요일에 잘 안 고쳐지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마음 구석에 떠올랐다.
알람시간보다 훨씬 더 일찍 깬 긴 하루가 또 다시 시작됐다. 다행히 첫째는 학원 일정도 있고 스터디카페라는 피신처가 있는데, 아무 일정이 없는 둘째가 문제였다. 아침에 잠이 덜 깬 애를 데리고 병원에 같이 출근을 했다. 안 따라가겠다는 애를 닌텐도 스위치와 만화로 협상해서 병원 외래로 같이 출근했다. 평소 같으면 챙기지도 않는 아침을 먹고 숙제를 좀 시키고 싶었으나, 닌텐도 게임과 만화 보기만 반복했다. 그래도 학교 앞 치과에서 검진할 때 지적받은 충치 치료를 하나 했으니 위안을 삼아 본다. 오후에 낯선 번호의 전화가 한통 왔는데, 왠지 꼭 받아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일 방문하기로 한 에어컨 AS기사님인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왔는데 시간이 되냐는 것이다. 나는 조퇴를 할 수도 없고 가는데도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지라, 아내에게 급히 연락을 했다. 아내의 회사에서 며칠째 에어컨이 안 나오는 사정을 알던 터라 쉬이 외출을 해서 수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일을 다 안 마치고 나와서, 야근을 하러 가야했다. 외래일정을 마치고 둘째랑 같이 퇴근했는데, 실외기 고장으로 수리비가 꽤나 나왔다고 했지만, 다행히 수리가 잘 돼서 어쩌다 혹서기 훈련이 4박 5일로 하루 정도 일찍 마무리됐다.
한여름이 오기전인 봄에 보통 제조사에서 진행하는 에어컨 점검을 받아야지 했는데, 약간 미루다가, 6월에 학회 가느라 시기를 놓쳐버렸는데, 내년에는 미루지 않고, 꼭 잘 챙겨야지 다짐했다. 출장을 같은 단지에 왔다는 이유로 빨리 에어컨을 수리해준 AS기사님께 이 글을 보시지는 않겠지만 감사드린다.
앞으로 어쩌다 혹서기, 혹한기 훈련을 겪지 않도록 미리 잘 챙겨하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나름 거금을 들인 에어컨 수리였는데 앞으로 한동안은 별 일 없이 잘 일 해줘서 혹서기 훈련을 겪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http://www.chihak.co.kr/news/2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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