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심이 많으셔 ‘己所不欲 勿施於人’ 몸소 실천하시던 어머니
힘든 일상에도 아들 치대 합격에 밝게 박수치신 모습 못잊어
조남억
인천서구치과의사회 회장
연세조아치과의원 원장
인천평화복지연대 공동대표
연세치대동문회 총무이사
영원히 나의 옆에 계실 줄 알았던 엄마가 떠난지 1년이 넘었습니다. 아직도 순간순간 엄마 생각에 울컥울컥 하기도 하지만, 그 만큼 내가 더 잘 살면 엄마가 좋아하실거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 잡곤 합니다.
얼마 전 동물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을 보는데, 중성미자에 대한 대사가 있었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기본입자이긴 한데, 질량과 전하가 거의 없어서, 오랫동안 실체를 알 수 없던 입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중성미자가 마치 추억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격하게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현재 존재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나를 이루는 기본 입자가 되어있는 것이 바로 그 수많은 추억들이구나 싶었습니다.
엄마에게 받은 것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말씀입니다. “내가 받고 싶은 것을 남에게 주고, 내가 받고 싶지 않을 것을 남에게 주지 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8남매의 맏며느리, 4남매의 장녀로서, 할머니 할아버지도 50년 이상 모시고 살고 있었으니 우리집에는 항상 많은 손님들이 왔다 가셨습니다. 18년 동안 인천제철 다니는 분들 10여명을 하숙하는 집이었으니, 집에는 항상 사람이 북적였습니다.
그런 많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오신 엄마는 속상한 일이 있을 때나 즐거울 때나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옆집 누구가 친척에게 이런 일을 당하면서 기분 나쁘다고 노발대발 하더니, 정작 본인은 나에게 똑같이 하더라.”, “내가 누구에게 이렇게 했을 때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남에게 그렇게 안하더라.”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었습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가 논어에 나오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말과 비슷하고, 성경이나 다른 많은 격언에도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엄마는 어디서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생활속에서 깨닫고 실천하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치대 본과에 다닐 때, 매일 시험 보느라 밤새 공부하다가 토요일 낮에 집에 와서 낮잠을 자는데, 밖에서 누군가 싸우는 소리가 나서 깨어났습니다. 그 당시 인천백화점 청소일을 하시던 엄마는 다른 아주머니와 담요 한 장을 들고 서로 싸우고 계셨습니다. 청소부 쉼터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담요를 아무도 빨려고 하지 않아서 본인이 빨려고 가져왔는데, 서로 “당신이 매일 이런 일을 하니까, 오늘은 내가 가져가서 빨겠다.”고 서로 담요를 당기고 계셨습니다. 공용 담요를 남에게 빨라고 미루는게 아니라, 서로 빨겠다고 당기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습니다. 기다란 숟가락으로 자기만 먹겠다고 싸우는 지옥과 서로 먹여주는 천당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 어느 경영학 동영상을 보다보니, 이타적인 행동이 결국 자신을 위한 행동이 된다는 강의를 보았습니다. 엄마는 배우지 않아도 어떻게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셨던 건지, 어떻게 살아야할까 삶에 의문이 들 때마다 중성미자처럼 저에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엄마가 나에게 남겨준 두 번째는 가장 행복한 장면입니다. 아무리 힘들도 마음상해서 우울할 때에도 이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고 미소가 생기게 하여, 살아갈 힘을 주는 행복입니다.
동인천역 화수동에서 인천고등학교에 다닐 때 왕복 1시간씩 두 시간이 걸렸었습니다. 고2까지는 그렇게 다녔었는데, 고3이 되자, 나와 친하게 같이 다니던 친구네가 학교근처로 이사를 갔습니다. 아침에 만원버스에 치여 학교에 8시에 도착해보면, 그 친구는 6시부터 나와 있었고,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10시에 나는 나오는데, 그 친구는 12시까지 학교에 남아 있다가 간다고 했습니다. 하루에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자율학습 시간이 3~4시간 밖에 안 되는데, 그 친구는 나보다 4시간을 더 하는 셈이었습니다. 도저히 경쟁이 안 되겠다 싶어서, 엄마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집에 와서 잠만 자고 빈 도시락 채워가기만 하는 것 같은데, 시간이 너무 아깝다. 학교 근처에 잠만 자는 방만 얻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 후 엄마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가마솥에 나무를 때서 밥을 하고(화수동 언덕위에 있는 우리집은 아궁이에 나무를 때다가 93년에 드디어 석유보일러로 교체공사를 했었습니다.) 도시락 3개를 싸서, 6시에 나와서 7시에 인천고 근처에서 나를 깨워주고 빈도시락을 챙겨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인천제철 식당으로 8시까지 출근을 하였습니다. 가끔씩은 버스에서 졸다가 한참을 넘어가서 되돌아오느라 지각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지금의 나의 나이와 비슷했던 그 때의 엄마를 생각해보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습니다. 저는 못할 것 같아요.)
그 덕분에 저는 학교에서 새벽 3시까지 공부하다가 방으로 가서 잠을 잤고, 아침 7시에는 기상할 수 있었고, 엄마를 생각하며 딴 시간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재수를 하게 되었고, 다행스럽게 연세 치의예과 합격소식을 듣고, 신체검사 한다고 전철역으로 가는 길에, 인천백화점 청소원으로 일하고 계신 엄마를 불러달라고 경비아저씨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엄마가 좁은 계단으로 올라오셨고, 나 합격했다고 말하니, 엄마가 활짝 웃으시며 박수를 치면서, “너무 잘되었다. 너무 좋다.” 고 하셨는데, 그 장면은 내가 본 장면 중에 제일 행복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어떤 일로 아무리 힘들어도, 그 장면을 떠올리기만 하면 웃을 수 있는 장면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할 때마다 엄마의 말씀을 떠올리고, 힘들고 우울할 때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것이 나의 중성미자가 되어, 나의 기본입자가 되고,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 엄마가 떠나간 지 벌써 1년이 넘었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엄마를 생각하면서 더 인간답게 더 행복하게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엄마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