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실리 있었겠지만 지나서 평가해보면 낭비요 잡음
정말 좋은 것은 그 따뜻함의 본질이 변하지 않으니까
김 용 호
서울중구치과의사회 고문
김용호치과원장
올해 아흔일곱 살이신 필자의 백모께서는 아직도 정정하시다. 무릎이 시려 3~4년 전부터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는 것과 작년부터 심근경색 관련 처방약을 드시기 시작한 것 외에는 지병도 없으시다. 게다가 마음은 아직 청춘이라며 당신 지인들의 집안 대소사 참가는 물론, 오남매와 사위, 며느리, 손주들과 주변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으로 전해주시는 잔소리로 하루가 꽉차게 분주하신 ‘현역’ 어머니시다. 봄날 같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며칠 전, 치아 점검차 오셨다 가시며, 의례의 잔소리 ‘추운데 오바들 잘 입고 다니고…’ 하시곤 가셨는데, 잠시 후 올 스물셋인 막내 직원이 “그런데 원장님… 오바가 뭐에요?” 한다. 필자는 매일 보는 직원이 이런 질문하는 게 장난 같았지만, 묻는 표정이 진지하고, COVID-19로 다음 예약환자도 취소된 김에 뭐 좀 아는 척하며 대답을 좀 했다. “오바는 오버코트라는 서양말을 일제시대를 겪은 분들이 쓰는 말인 듯 해요. 잠바는 아나?” 했더니 용케도 잠바는 안단다. 한때 필자가 자라던 10~20대의 80년대는 ‘오리털파카’의 시대였으며, 입으면 마치 미쉘린타이어 광고같은 스타일에 엄청나게 따뜻한 ‘잠바’가 있었고, 어느 해 겨울인가 백화점마다 진열되더니 웬만큼 어렵지 않은 집 애들은 하나씩 입고 다녔다는 얘기 끝에, 그 이름은 ‘오리털잠바’도 아닌 ‘오리털파카’였고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고 설명했다. ‘전설의 고향’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열심히 듣는 막내 옆에 어느새 나머지 직원들도 구경거리 난 듯 다가와 듣고 있었다. 평소 직원들이 필자가 하는 얘기는 늘 지루해하는 듯해서 보통 긴 얘기를 안 하는데, 관심들을 보여주니, 얘길 더 이어갔다. 그 다음 몇 번의 겨울이 지나지도 않아 오리털이 들어가지 않은 양가죽코트 비슷한 ‘오바’가 유행했는데, 그 이름 또한 처음 들어본 ‘무스탕’이고 ‘토스카나’ 였었다는 둥, 그게 비싼 건 엄청나게 비싸서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고가품도 있었다느니 하며 슬슬 얘깃거리가 떨어져 가는데, 필자의 말을 끊고 막내직원이 그게 무슨 옷이고 어떻게 생긴 거냐고 물어왔다. 마침 리셉션데스크 PC가 검색포탈 화면이길래, 오리털파카와 토스카나 등을 찾아 보여주니, 막내의 호기심 가득, 흥미진진한 눈빛은 이내 사라져버리고, “에이! 모조리 아우터들이네요, 원장님!” 이란다. 이 부분에선 내가 놀랐다. 아우터라니? 필자는 처음 듣는 말인 바, 그건 또 뭐냐고 실장을 바라보니, 막내가 어느새 키보드를 제 앞에 놓고 아우터라 친단다. “이런게 다 아우터에요!”하며 모니터를 가리키는데, 보니 필자가 그 옷들에 붙이고 싶은 이름은 모두 앞에서 나온 이름들, ‘오바, 잠바, 파카, 무스탕, 토스카나’ 들이었다.
필자는 지난 20년간 카니발(대한민국 국민 모든 분들께서 너무나 잘 아시는 차라 그냥 실명을 사용)이란 국산 미니밴을 타고 다닌다. 작년 12월에 11년을 탄 세 번째 카니발을 처분하고, 통산 네 번째로 카니발을 또 구입했다. 5년 전 소천하신 선친께서는 가족모임이나 여행 때마다 필자의 큰형이 모시겠다는 검정색 세단승용차보다는 필자의 카니발을 더 좋아하셨다. 매번 “난, 용호 봉고차가 편해. 느이 엄마는 고급세단 타고 오라고 해라!” 하셨고, 가끔 당신 친구분들 만나 식사하실 때도, “너도 아들에게 봉고차 사라고 해라. 그 차가 세상 제일 편해!”라고 하셨단다. 선친께서는 한 번도 필자의 미니밴을 카니발이라고 부르신 적이 없다. 그렇게 평생을 매번 봉고차라고 하셔도 모두가 알아들었고 우리가 카니발이라고 해도 “응! 봉고차?”라시며 알아들으셨다. 하지만 승합차나, 미니밴, 혹은 SUV, MPV라고 해도 알아들으셨었을런지는 잘 모르겠다.
명장 프란시스 F. 코폴라 감독 1979년작 영화 ‘지옥의 묵시록’은 베트남전을 통한 미국의 반성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전개되는 모든 에피소드들이 전쟁의 광기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행과 폭력의 상황들을 보여주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미군이 여러 대의 헬기로 베트남 부락을 공격하는 장면이다. 헬기부대 지휘관인 킬고어 중령(로버트 듀발 분)은 마을 해변의 파도가 좋으니 당장 마을을 공격하고 서핑을 하자는 식의 기행을 일삼는 전형적 전쟁광인데, 딱 한 장면에서 그의 대사가 필자에게는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말이 되는 내용이었다. ‘우리부대 이름은 기병(騎兵, cavalry)인데, 이젠 말을 타지 않고 헬기를 탄다’는 그 대사는 영화에서 묘사되는 모든 내용들이 광기요 부조리라 그런지, 별 것 아닌데도 이 부분만은 이해가 되고 납득도 가는 부분으로 필자의 기억에 남는다. 말이 당연히 된다. 기병대의 재빠른 돌격이나 헬기의 공중강습이나 그 개념은 본질적으로 같으니까.
주변을 둘러보면 그것의 이름이 어찌하다 그렇게 지어졌는지 처음엔 갸우뚱하지만 사연을 들어보면, 관계도 없을 지금 그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제법 많다. 제럭스는 복사기요, 클랙슨은 자동차 경적이고, 호치키스는 지철기(紙綴機, stapler)다. 이렇게 미니밴보다는 봉고차이듯 오히려 본질을 반영한 이름이 어색하고 ‘안 직관적’이고 ‘못 직관적’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국가 유지를 위한 기본적 필수기능을 위해 정부 부처는 11부 4처(내무부, 외무부, 재무부, 국방부, 법무부, 문교부, 농림부, 상공부, 사회부, 교통부, 체신부, 보건부, 총무처, 공보처, 법제처, 기획처)였다고 한다.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당연한 듯 조직개편을 단행(?)하고 그 이름도 새 시대를 여는 양 갈아치우며 심지어는 이미 담당 부처가 있음에도 업무가 중복되는 부처를 신설하기도 했다. 일례로 문교부라는 이름에서 일제의 잔재를 걷어내고 새 시대의 새 교육을 지향한다며 문(文)자를 빼고 교육부로 갔다. 그리고는 차라리 그 포괄적인 개념의 개명에 남아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거기서 문(文)자의 허전함을 과학기술이라는 글자로 채워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가 되었다. 그렇게 변화의 칼질을 당한 여러 부처들의 이름은 잘 들여다 볼 것도 없이 교집합의 교집합이 중첩된 이름들이다. 지식경제부, 재정경제부, 기획재정부, 산업자원부… 심지어는 내무부의 이름이 행정안전부가 되고 행정안전부는 안전행정부로 이름을 바꾸는 말장난들이 이어졌다. 말장난에서만 끝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기존 조직들이 제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서로 협력하는 데에 태만과 한계를 느낀 끝에 그 병든 조직을 고치고 되살리는 노력없이 구름 잡는 듯한 새 조직을 만드는 미래창조과학부란 작품도 있었다. 명분도 있고 실리도 있었겠지만 지나고 나서 평가해보면 낭비요 잡음이었다. 예외적으로 1960년대와 70년대에 눈부신 경제적 발전에 맞추어 경제기획원이, 건설부가, 동력자원부가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까지는 모두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또 해야만 할 일이었지만, 아닌 것들이 훨씬 더 많았고 지금도 진행중 임은 참으로 안타깝다.
여기서 그 옛날 이름과 지금의 이름이 사뭇 아련한 대조를 이루는 부처가 있다.
체신부(遞信部), ‘믿음을 전해주는 부’. 정말 놀랍다. 누가 그런 이름을 지었을까? 우정사업부(郵政事業部)같은 이름이 아닌, 좀 더 고상한 개념적 발상으로 작명을 하였는데, 참으로 이 이름을 읽어볼 때마다 그래도 현자들이 정치와 행정의 일선에 나와 겨레의 앞날을 희망과 인류애로 보듬던 1948년이 부럽다. 온라인의 어느 사회기사 아래서 읽었던 ‘줄여 읽어 지경부, 외통부, 보복부라는 이름을 마구 지어 쓰는 정권들이 행정부를 어지럽히더니 결국 이 나라가 보복과 외통수를 자처하는 지경에 왔다’라는 인터넷 댓글이 기억난다.
시대적 요청도 있고 행정이라는 업무의 사정도 있겠지만 이름을 바꾼다고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이름을 바꾼다고 지나간 과오와 성취가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을 잊고 사라지게 해서 또 어쩌자는 것인가. 오히려 그 과오와 성취들을 곰곰 들여다보며 신중히 취하고 과감히 버리는 중에 비로서 오늘이 보이고 내일이 약속되는 것임을 정녕 모르는 바 아닐 터.
백모님께서 ‘추운데 오바들 잘 입고 다니고…’ 하신 속마음엔 후손들이 춥지 않게 잘 지내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잠시 ‘오바가 뭔데요?’ 묻더라도… 금세 따뜻한 할머니의 사랑이란 걸 알게 될 테니까, 그것이 ‘아우터’로 이름이 바뀌어도 상관없다. 정말 좋은 것은 그 본질이 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자기 좋자고 이름 바꾸고 이전과 같은 것이라 억지 쓰며 그 따뜻함의 본질을 거두어가는 자들은 어찌하면 좋을까요, 큰 어머님?
http://www.chihak.co.kr/news/13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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