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흥 우
李興雨齒科醫院 院長,哲博
책에 파묻혀 지내던 젊은 날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견고한 생각의 껍질 속에 갇혀 관념의 노예처럼 사는 자신에 놀라, 부모와 형제와 환자들이 있는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자고 다짐했었다. 그리곤 오랫동안 바쁜 생활 전선에 있었다.
일상의 현장에서 우리가 모든 상념을 놓아버리고 살 수는 없다. 어느 생각이든 쉽게 매몰되는 인간 습성을 조심하고 또 헛된 망상을 경계한다고 할지라도, 우린 금방 되돌아선 모든 걸 잊고 사유의 정원을 천연덕스럽게 산책한다. ‘이 생각은 정말 내가 한 것인가, 내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
원래 내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주변에서 날아온 신문과 방송, 최근에는 유튜브까지 가세해, 쏟아져 들어온 정보들로 내 머리는 금방 하얘지고 검어지고 노래진다. 본래 내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밖의 것들이 들어와 내 머리를 메운다. 게다가 한번 굳어진 생각들은 쉽사리 바뀌지도 않는다. 나는 늘 생각에 갇혀 있고, 감각, 감정 또한 제 나름의 궤도 안에서 맴돈다.
몸속 어두운 곳에 사는 촌충은 촉각을 발달시켰고, 나비나 고래는 목적지를 찾을 때 지구의 자기장도 느낀다. 인간도 생존을 위해 주변 환경에 적응한 감각을 진화시켜왔다. 그렇다고 인간 시각이 먼지까지 전부 볼 수 있는 건 아니어서 적절한 크기의 한계 내에서만 보고, 또 청각은 들을 수 있는 주파수, 즉 음파 20Hz 이상 2만Hz 이하의 진동횟수만 듣는다.
심장박동이 지구 진동에 공명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연환경 속에서 감각뿐만이 아니라, 감정, 생각도 고유한 체와 틀로 발달시켜왔다. 그렇게 생각의 틀을 만들어 삶에 유용하게 쓰지만, 한편 그 틀에 갇혀 생각을 펴므로 우리는 알고 있는 것 밖으로 쉽게 나갈 수가 없다.
이 생각이란 것을 근원부터 더듬어보자면, 우리가 맨 처음 세상에 나와 느낀 것은 어머니의 감촉이었고 그래서 떠다니는 생각의 시초도 어머니의 체취와 숨결로부터 왔다. 어머니란 우선적 잣대에 맞춰, 35억 년의 유전자가 길들인 모습대로, 감각, 감정, 생각의 체와 틀을 거쳐나온 대로, 우리는 세상의 이치가 이렇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우린 자라면서 개념이나 이론이란 틀을 도구처럼 사용했다. 망원경과 현미경이 세상을 더 멀리 더 자세히 보게 하듯, 숫자와 개념도 우리가 더 편리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고, 만약 틀린 것이 밝혀지면 다시 고쳐서 다른 상상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새로운 틀마저도 전모가 아니라 사실의 일면만을 설명할 뿐이다.
우린 많이 아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한계 때문에 부정확하게 아는 게 더 많다. 외부 대상이나 상황을 느끼고 알아채는 감각, 욕망을 충족시키는 정도에 따라 가치를 정하는 감정, 기억하고 상상해 예측하거나 판단하는 생각, 이 모두가 내재적 한계를 갖고 있다. 앎은 살아가는 데 필요하지만, 무엇을 안다고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틀을 멍에처럼 지는 셈이다.
생물학적 유기체인 우리 몸이 팔다리와 몸통과 머리로 분리되는 순간, 다리는 살아있는 다리가 아닌 죽은 다리가 되고, 분리한 후 다시 분리된 것을 합친다고 원래 살아있던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 ‘분리의 합’이 다시 ‘전체’가 되지는 않는다. 관념을 만드는 것도 일종의 분리행위여서 마찬가지의 오류를 만드는데, 본래 분리할 수 없는 것을 편의상 개념으로 제한하는 첫 단추에서부터 사고의 착각도 잉태된다.
광활하게 펼쳐진 우주의 빈 시공으로 날아들어, 하나둘 채워지는 생각들. 바람이 불면 다시 날아가고, 또 다른 상념들이 날아온다. 본능인 생존 욕망과 삶의 의지 너머로, 감각의 체험과 감정의 기억이 쌓여, 분별하고 판단하고 개념화하고 추리해, 지구에서 우주로, 감각, 감정, 생각을 넘어, 상상이야 멀리 자유롭게 날아 보자꾸나.
http://www.chihak.co.kr/news/15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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