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아이디/비밀번호찾기  l  2022.8.13 (토)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기사 메일전송  기사 출력  기사스크랩
 http://www.chihak.co.kr/news/6654
발행일: 2013/12/28  치학신문
원로 인사가 엮는 회고록 - 岩泉 邊碩斗 (85)
쥐꼬리만한 광고비 수입도 우선 회 운영비로 써버려

기관지 4면 채우기 위한 자료 수집과 편집 열정

 

수입예산 징수율 20% 내외여서 기관지 발행 난감

 

팔순 기념 전가족 싱가포르 여행때(2013년10월).

 

 오늘 현재까지 기관지로 비약적인 발전으로 이어져 온 치의신보(齒醫新報)로의 개명은 필자와 대학동기생인 당시 편집인. 박윤수 공보이사(치협 총무이사. 총회 부의장. 의학박사. 작고)때 필자가 두 번째 공보위원으로 위촉되어 공보위원회의를 1974.9.7. 저녁 신촌 한식 식당에서 공보위원장을 비롯한 공보위원(필자. 임채균. 최광철. 정태영. 이호용)들이 참석 새로운 제호로 여러 가지 논의하다가 치의신보로 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해 치협 이사회에 부의 의결 되었다. 제호(題號)는 서예가 철농(鐵農)이기우(李基雨)선생의 작품이다.
 8.15 광복 후 우리 치과의사들의 모임 결정체(結晶體)인 치과의사회도 결성 되었으나 그 세(勢)마저 미미하였고 재정적 측면도 보잘 것 없어 회 운영난을 몹시 겪었다는 자료들을 엿 볼 수 있었다. 실제 필자가 처음으로 치협 공보위원으로 위촉되고 난 후 열심히 이한수 공보이사와 정기근 공보위원 셋이서 기관지 4면을 채우기 위한 자료 수집과 편집겴關瘦沮?다 해놓고서도 인쇄소에 인쇄비를 지불치 못하여 몇 달씩 묵혀 있다가 결국 발행 일자를 지키지 못 하여 등록 취소로 이어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는 치협 사무국장으로 있던 최효봉 선생이 우리 치과계에서 간행물 발간에 일가견(一家見)이 있었기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전임(專任) 신문 기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큰 지장은 없었다.
 치과의사회 운영에 있어서도 회원들의 회비 납부율이 저조하여 협회장이 우선 대납하고 회비가 어느 정도 들어오면 그것으로 상쇄(相殺) 시키고 하였다. 사무국이래야 국장과 경리(야간교 여고생) 그리고 잡무 직원 등 3명으로 구성 되어 있었다. 기관지 발행 담당 부서도 1945.12.9.조선 치과의사회 창립총회(위원장.안종서) 이후 1959.4. 제8차 대한치과의사협회(협회로 개칭) 총회(협회장. 안종서)에서 처음으로 편집이사(이한수, 박광진)가 집행부에 편성 되었다가 다음 해 제9차 총회(협회장. 한동찬)에서는 출판이사(김황중)로, 1962.10. 제11차 총회(협회장. 안종서)에서 현재의 공보이사(선우양국)로 확실하게 자리 매김이 되었다.
 필자가 공보위원으로서는 낮에는 주 임무인 육구본부 의무감실 치무과 요원으로 일하고 5시 퇴근 후 또는 토요일 오후 한일병원 치과 또는 야간 개업을 하고 있던 동대문의 이한수 치과에서 정기근 군과 같이 일을 했었다.
 기록에 따르면 1950년대의 총회 결산보고를 되돌아보면 수입예산의 징수율은 20% 내외였으니 인건비(봉급)와 무엇으로 회를 운영하고 기관지를 발행할 수 있었겠는가?  오죽하였으면 당시 안종서 회장은 한국의약시보에 담화문을 발표 하였는데 ‘과거 1년간 회의 책임자로서 운영을 해 왔으나 산하 단체의 협력을 얻지 못한 관계로 극난(極難)을 겪고 있다. 전시하 또는 피란 생활중 불여의한 각 회원의 실정도 추측은 하는 바이나 현상 그대로는 존속키 곤난이며……’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들 선배들은 이러한 역경을 딛고 오늘날 그 누구에게도 손색없는 우리들 치과의사협회와 기관지 치의신보를 튼튼한 토대(土臺)에 이끌어 놓았다.
 그때의 기관지는 보통 4면으로 중앙회의 이사회 소식과 회무 및 지부 소식, 회원 동정(動靜)으로 주로 개원, 폐원, 이전 등과 몇 몇 회원들의 글을 게재하였으며 광고도 몇 몇 기재상과 기공소 뿐이었으므로 그야 말로 빈약하기 이를 때 없었고 그 쥐꼬리만한 광고비도 우선 회 운영비로 써버렸기에 인쇄비는 후순위로 밀리기 마련이었다. 특히 지부 소식들은 각 지부에서 자료 제공이 여의치 않아 많은 애로를 겪었으며 이렇게 겨우 면을 채우고 인쇄까지 끝내놓고 인쇄비 미지불로 찾지 못하는 그 심정 특히 공보이사의 그 허탈감은 겪어 보지 않으면 이해가 잘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격랑기(激浪期)와 1974년4월 안정기(安定期)의 두 번째 공보위원(협회장 김동순. 공보이사 박윤수)을 지냈던 필자로서 오늘날 받아 보는 치의신보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송무백열(松茂栢悅)”(남의 잘됨을 기뻐함)이라는 사자성어를 전하고 싶다.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독자의견 (총 0건)
독자의견쓰기
* 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 등 목적에 맞지않는 글은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등록된 글은 수정할 수 없으며 삭제만 가능합니다.
제    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스팸방지            스팸글방지를 위해 빨간색 글자만 입력하세요!
    
슈퍼씰
아이스팩

치학신문
2022년 7월
덴탈플라자
 
  l   신문소개   l   광고안내   l   구독신청   l   기사제보   l   개인정보보호정책   l  
회사명 : 주식회사 치학신문  |  07225 서울시 영등포구 버드나루로 18길 5
광고접수 : 02-2632-6858(대표)  |  편집국 : 02-2679-9389  |  출판국 : 02-2633-9389, 02-2679-6820  |  팩스 : 02-2671-9389
제호 : 치학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6464  |  등록일 : 1987년 08월 07일
명예회장 : 임채균, 이재윤  |  회장 : 김홍기  |  발행인 : 장백용  |  편집인 : 심영섭
치학신문의 모든 컨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치학신문은 신문윤리강령 및 주간신문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Copyright © 2017 치학신문. All rights reserved. chihak@daum.net
Powered by Newsbuil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