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이제는 커피 때문에 당당
커피 내리는 과정 ‘시간 잡아 먹는다’ 의미 부여
유선태
포천·이동열린치과 원장
요즈음 책상에 놓인 달력을 보면 속으로 어이쿠, 싶을 때가 잦다. 분명히 작년 11월쯤에 겨울맞이 대청소다 뭐다 해서 분주하던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해를 넘기고도 두 달이 훌쩍 지났다는 것이다. 공들여 셈하고 열심히 기억에 갈무리해두지 않으면 시간이란 녀석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그냥 스쳐지나가고 만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 반갑게 맞아들여야 할 텐데 영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어영부영하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또 잘 시간이 되니 도무지 숨 돌릴 틈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조금이나마 시간을 붙들어 둘 수 있는 요령이 하나 생겼다. 글로 쓰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별 대단찮은 궁리지만, 나처럼 달력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철렁한 이들에게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비결은 별 것도 아니고, 그냥 커피 한 잔이다. 항상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어물어물하곤 했던 내게 최근 당당하게 ‘취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생겼는데 바로 커피였다. 물론 삼십여 년 가까이 믹스 커피만 마셔 온 내게 갑자기 커피 맛을 감별하는 재능이 생겨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내게 커피는 쓴물이다. 중요한 것, 그리고 이전과 달라진 것은 한 잔의 커피를 내 손으로 내려 먹는 과정에서 내가 갖게 되는 잠깐의 여유다.
어차피 커피의 맛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종이컵에 담긴 믹스 커피에 뜨거운 물을 붓는 것이나, 커피를 내려먹겠답시고 한참 부산을 떠는 것이나 느끼는 맛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내가 직접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 직접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이고, 필터에 커피를 받쳐 물을 붓는 동안 세상은 참 고요해진다.
아주 잠깐이나마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서, 그리고 어쩌면 나 스스로로부터 멀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 한 시간, 아니 단 5분이라도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하나에만 집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원두를 갈아 그 가루를 필터에 받치고, 물을 끓여 비로소 한 잔의 커피를 내리는 참 복잡하고 번거로운 이 과정은 어떻게 보면 그 ‘시간을 잡아 먹는다’는 점에서도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다 못해 휴대폰으로도 충분히 전문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이들이 있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믹스 커피야 매 스틱마다 동일한 방식으로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오니 물만 제대로 부어 준다면 항상 같은 맛이 나겠지만, 직접 내려 마시는 커피는 그렇지 않다. 어떤 원두를 쓰는지부터 시작해서 원두의 상태와 얼마만큼 곱게 갈렸는가 하는 것, 필터에 담는 원두의 양과 물의 온도, 심지어 그날의 온도와 습도까지 생각보다 많은 요인들이 그 맛을 달라지게 한다. 고쳐 말하면 한 잔 한 잔이 다른 것이다. 마치 필름 카메라로 찍어 낸 사진이 암실에서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현상되어 나올 때 그 한 장 한 장이 전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시간과 공을 들여 무언가에 매달린다는 것, 그리고 매번 달라지는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 두 행위는 꽤 닮아 있다.
모든 사진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 한 장 한 장에 그 시간과 추억이 깊게 배어 있고, 정성을 다해 내린 커피 한 잔에는 충분한 여유와 시간이 녹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온전히 나의 시간 몇 분을 들여 열과 성을 다해 서투르게 끓여낸 커피 한 잔을 눈앞에 두고 있자면 또 평소에는 바빠 잊고만 살던 생각들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할 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잊었던 안부 인사 전하기, 몇 주 전에 사 놓고 시간이 없어 어딘가 처박아 두었던 책 펼쳐 보기 같은 것들이 문득 내키기도 한다. 고작 오 분에서 십 분,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조금씩 달라져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무슨 팔자에도 없는 커피에 갑자기 눈독을 들여 원두니, 분쇄기니, 포트니 하는 것을 사들이는 나를 보며 누군가는 우스워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이가 있다면 이렇게 시간을 들여 내린 커피는 그냥 홀랑 마셔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 잔 안에는 오 분 이상의 시간이 진득하게 고여 있다는 이야기를 다정히 건네주고 싶다.
http://www.chihak.co.kr/news/1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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