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부터 추운 겨울까지 기관지 보호할 약선 음료”
조 재 오
경희대 치전원 외래교수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과일이 모두 맛있지만 그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필자는 서슴없이 배를 고르리라. 한국산 배야 말로 그 맛이 세계에서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다.
수년전 나주 배 맛에 놀란 미국 사람들이 농무성 검사관을 나주에 파견하여 까다로운(?) 검사를 거쳐서 수출된 나주의 배가 New York의 유수한 백화점 과일 corner에서 비싼 가격에 날개 돋친 듯이 팔린다는 미국인 교수의 말에 이제야 비로소 미국 사람들이 제대(?)로 된 배 맛을 보는구나 하고 웃던 일이 있었다.
사실 남도 땅 나주를 떠올리면 배가 먼저 생각난다. 배하면 또 나주로 통할 만큼 나주와 배는 우리에게 하나의 공식처럼 각인돼 있다. 호남 사람이면 나주배, 특히 ‘신고’나 ‘이마무라’ 등의 배 품종 정도는 기억하며 이는 상식에 속한다.
나주배 재배농가는 3300여 가구에 달하며 면적은 2만8500여㏊에 이르러, 나주의 배 생산량은 전국의 배 생산량의 23%, 전남지역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나주 배는 석세포가 적어 과육이 연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으로 과즙이 많고 단맛의 농도도 높으며, 모양 좋고 색깔 또한 고우며 타 지역 배에 비해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다.
나주는 배 재배에 적합한 기상여건과 영산강 유역 양질의 토양 등 최적의 자연환경 덕에 이미 삼한시대부터 오랫동안 재배되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최초의 재배기록은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이미 나주 목의 토공 물로 나주배의 목록이 나와 있고, 1871년에 발간된 〈호남읍지〉엔 진상품으로 나주배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근대적인 재배는 1910년대부터 나주시 금천면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광주 조선치대에 몸담고 있을 시절 김생곤 교수(조선치대 동물학교실)의 춘부장께서 나주에서 과수원을 운영하고 계셔서 김 교수 연구실에 갈 때마다 배 즙을 즐기곤 하였다. 보기에 탐스런 배를 얻기 위해서 배꽃이 필 때부터 수확할 때까지 무려 마흔 번 정도의 농약을 뿌린다고 하니 거의 한 주일에 한 번꼴로 농약을 살포하는 셈이라고 한다. 인건비와 농약 값 그리고 거기에 드는 농부의 땀 어린 정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궁중에서는 과일 중 배를 많이 사용했으며, 배숙은 배로 만든 대표적인 궁중 음료로서 생강 물에 배와 꿀을 넣고 끓여 만들었다. 쌀쌀한 가을부터 추운 겨울까지 마시며 기관지를 보했던 약선 음료였다. 특히 고종은 밤참으로 배를 많이 넣어 담근 배동치미에 국수를 말아 먹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달콤하고 시원한 동치미국에 육수를 더하고 메밀국수를 말고, 그 위에 쪽배처럼 수저로 떠낸 배를 하얗게 덮었다. 고종을 위해서 수라간 상궁들은 겨울이면 국수를 만들 육수로 쓸 배동치미를 따로 담글 정도였다고 한다.
배를 이용한 요리로는 배꿀, 배 찜, 배숙, 배주스, 배깍두기, 배잼 등이 있어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받아 왔다.
근자에 나주배의 수출 길도 다변화되어 2007년 미국으로 200여 톤을 시작으로 대만, 두바이에도 수출이 추진되어 2007년 수출 물량은 3000여 톤(700만불)에 이르고 있으며, 상표도 ‘그린시아 나주배(GREENCIA NAJU PEARS)’라는 고유 브랜드로 미국은 물론 대만·중동까지 넓혀지면서 교민들은 물론 현지인들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다.
배의 효능으로 기관지질환 예방 및 개선효과가 있으며, 해열, 해갈작용이 있다. 배에는 변비개선 및 예방효과가 있으며, 연육작용이 있어 고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때문에 갈비, 불고기 등에 많이 사용된다. 또한 배는 숙취해소 기능을 가지고 있고, 체내의 노폐물과 독소를 체외로 배출시켜 준다.
배에는 적지 않은 비타민과 미네랄이 함유되어있어 혈관건강과 혈류를 개선할 수 있다. 또한 배에는 펙틴 같은 식이섬유도 포함하고 있어 혈중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역할을 하며, 체내의 면역력을 증가시켜주는 미네랄, 비타민 등의 성분을 포함하고 있어 암 유발 물질을 대부분 체외 배출시키며, 칼륨성분이 풍부한 덕에 체내의 불필요한 나트륨을 체외로 배출시켜 혈압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배는 기본적으로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 몸이 찬 사람은 과하게 섭취 시에 설사, 복통 등의 부작용이 있다.
필자가 광주 조선치대에 몸담고 있을 시절 어느 해 구정연휴에 서울 오는 길에 윤창륙 교수(조선치대 구강내과)의 승용차에 편승한 일이 있었다. 필자의 서울 집에 와서 윤 교수는 배를 한 상자 선물하고 갔다. 문제의 배는 윤 교수가 당일 출발 시간까지 늦추어 가며 몸소 시간을 내어 나주까지 가서 사 온 것으로 그 정성에 감복할 정도였는데, 사실 그 맛은 ‘무’ 수준의 돌배 이었다. 후일 윤 교수의 말로는 선물을 받았던 윤 교수의 형제들이 이구동성으로 ‘나주 무를 사왔냐’고 핀잔을 했다고 해서 웃었다. 나주의 배라고 해서 다 세계적인(?) 맛은 아닌 것 같다.
http://www.chihak.co.kr/news/1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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