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풍요롭게 하는 음력 정월 대보름 먹을거리로 돋보여
조 재 오
경희대 치전원 외래교수
약밥 또는 약식(藥食)은 찹쌀에 대추, 밤, 잣 등의 견과류를 섞어 쪄낸 후 기름, 꿀, 간장에 버무려 먹는 음식으로 잣을 섞으면 고소한 맛을 더할 수 있다. 약식이라는 이름은 꿀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꿀이 들어간 음식에 약(藥) 자를 붙이는 일이 많았다. 약밥을 ‘밥’이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콩밥이나 팥밥과 같은 주식의 개념 보다는 ‘떡’에 가깝다.
갖은 나물과 오곡 잡곡밥으로 한겨울 밥상을 풍요롭게 하는 음력 정월 대보름의 먹을거리로 단연 돋보이는 것이 약밥이다. 약식을 만드는 과정은 손이 많이 가는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요즈음은 전기압력밥솥에다 밥하듯이 할 수 있어 과거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약식을 즐길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한국의 정월 대보름 풍속에 관련, 비처왕(소지왕 炤知麻立干, 신라 제21대왕.재위 ; 479~500년)이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비처왕 즉위 10년 무진(488년), 왕이 천천정(天泉井)에 거동하였는데,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라고 했다. 왕은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는데, 기사는 남쪽의 피촌(避村)에서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어쩔 줄을 몰라 그 주변만 맴돌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기사에게 글을 주었다. 그 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돌아와 이것을 바치자,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그냥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겠다”며 글을 읽지 않으려 했는데, 일관(日官)이 “두 사람은 서민을 가리키는 것이고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라고 진언하였다. 왕이 마침내 그것을 열어보니, 안에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아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자, 거문고 갑 안에서 숨어있던 중과 궁주(宮主)가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왕 모르게 거문고 갑 안에 숨어서 간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그들을 사형에 처했고, 왕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까마귀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약밥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담 위에 얹어 놓았는데 까마귀가 날아와 맨 먼저 약밥을 먹었다고 한다.
이후 신라에서는 해마다 정월 상해일(上亥日)·상자일(上子日)·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으며 특히 1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약밥)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이것을 신라에서는 ‘모든 일을 특별히 조심하고 꺼린다’는 뜻의 달도(怛忉)라 불렀으며, 오늘날 한국의 정월 대보름 절식(節食)의 하나로써 약밥을 먹는 풍속의 유래가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담헌서(湛軒書)》에도 약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초하룻날에는 과일 두 그릇이고, 보름날에는 과일 한 그릇이다. 설날에는 탕과 떡이 각 한 그릇이고, 상원에는 약밥이 각 한 그릇이고, 유두(流頭)에는 수단(水團)이 각 한 그릇이고, 백종(百種)에는 상화(霜花)가 각 한 그릇이고, 3월 3일에는 화전(花煎)이 각 한 그릇이고, 9월 9일에는 국전(菊煎)이 각 한 그릇이고, 동지(冬至)에는 두죽(豆粥)이 각 한 그릇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도문대작(屠門大嚼)에 따르면 사신들이 중국에 약식을 가져갔을 때에도 대인기였다고 한다. 중국에도 약식과 비슷한 바바오판(八宝饭)이라는 요리가 있다
민간에서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 세 집 이상 성(姓)이 다른 사람 집 밥을 먹어야 그해의 운이 좋다고 했으며, 평상시에는 하루 세 번 먹는 밥을 이날은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믿었다. 또 이날 아침 아이들이 체, 얼맹이, 조리 따위를 들고 보름 밥을 얻으러 다니는데 이를 조리밥(더윗밥)이라고 하며 이 밥을 먹으면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처럼 대보름엔 약밥, 찰밥, 오곡밥, 조리밥과 관련한 이야기가 풍성하게 전해지고 있다.
필자의 처조모님께서는 성호사설(星湖僿說)로 유명하신 실학자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의 후손으로 오래전이지만 할머님이 시집오실 때 교전비가 쫓아와서 구한말의 노비 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근처에서 상전댁 일을 도우며 살아 왔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처가의 본가인 충남 청양군 비봉면에서는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사실 처조모님께서는 양반집의 깔끔한 음식 솜씨를 간직하셨었는데, 내자는 지금도 할머님께서 전수해 주신 여러 가지 반가 음식의 제조법에 대해서 향수 섞인 마음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그중 하나가 약식으로 우리 집 제사상에는 내자가 만드는 약식이 빠지는 일이 없다.
일전 이익 선생님의 직계 후손이신 고 이돈형 선생의 후손이 국보급에 해당하는 이익 선생의 유물을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이돈형 박사님은 서울치대 출신의 치과의사로 서울 중구에서 수도치과를 오랫동안 개원하셨었고, 처조모와는 인척이 되셔서 생전 이 박사님께서 처조모님의 총의치를 해 주셨었다. 지금은 이 분들도 다 세상을 하직하셨지만 내자가 만든 약과를 먹을 때면 처 조모님의 손맛이 느껴지는 듯하여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http://www.chihak.co.kr/news/17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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