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술은 소수의 부유층 보다 많은 사람에게 사용돼야
의사가 10분더 노력하면 환자는 10년간 더 편안
환자는 의사의 기술보다는 친절을 더 중히 여겨
이 재 윤
덕영치과병원장
본지 명예회장
1‘명의’란 의학지식이 많은 사람보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자여야 한다.
요즘 전문의는 많지만 명의는 적다. 한 가지만을 전공하여 한 분야에서만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진료 경험을 가지고 전 분야에 대해 골고루 공부하여 각 분야 끼리 유기적인 관계를 인식하고 환자의 아픈 곳을 총체적으로 치료하는 의사는 많지 않다. 히포크라테스나 허준같은 명의는 공부도 많이 했겠지만 많은 진료 경험을 가졌으며, 진정으로 환자를 위해 정성을 바치면서 명의가 된 것이다.
옛날 우석대학교에 뇌수술의 세계적인 명의가 있었다. 그는 6·25전쟁 때 수많은 수술을 경험할 수 있어서 뇌수술의 세계적인 명의가 되었다고 한다. 허준이 명의가 된 것은 어의가 되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사실보다도 그 이전에 오늘날 보건소와 비슷한 평민을 진료하는 기관인 혜민관에서 많은 진료를 하면서 느낀 점에 더 기인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허준은 치과치료도 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숙종이 이가 아팠는데 허준이 벌레 한 마리를 잡아내었더니 통증이 가셨다고 한다. 그 벌레란 다름 아닌 치아 속의 치수(신경)인 것으로 보인다.
좋은 진료를 하기 위해서는 의사의 지식뿐 아니라 기가 살아있어야 한다. 많은 지식이 있어도 진료를 하고 싶어 하는 의욕이 적거나 한 번에 두세 시간 진료할 수 있는 열정이 없다면 좋은 진료를 할 수 없을 것이다.
2 “괜찮다”하고 한번 더 “좋다”하고 한번 더
나는 보철물을 환자에게 장착시켜 보고 어떠냐고 물어본다. 처음에는 “아프다”, 때로는 “예민하거나 불편하다”라고 한다. 나는 열심히 보철물을 손질한다. 그리고 다시 물어본다.
“어떻습니까” “괜찮은 것 같습니까”
“처음이니까 조금은 이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한번 더 손질해 준다.그리고 다시 어떠냐고 물어본다.“아주 좋습니다.”
우선은 아주 좋다고 해도 집에 가서 막상 음식을 씹어 보면 불편할 수도 있다. 이번에는 환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전문가의 입장에서 다시 손질해 준다. 때로는 환자가 만족한다고 말을 해도 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 문제가 있으면 다시 만들 수도 있다. 가뭄 속 대지에 단비가 내린다. 비가 잎을 적시고 가지를 물들인다. 비가 충분히 와서 잎새 뿐 아니라, 뿌리 깊이 흠뻑 적셔야 마음이 개운하다. 처음 보철물을 끼울 때는 환자는 얼굴을 찡그린다. 한번 씹어보라고 하면 처음은 겨우겨우 힘들게 씹는다. 때로는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내가 최후에 손을 보고 씹어 보라고 하면 짹! 짹! 짹! 아주 가볍고 빨리 씹는다. 마치 주인에게 꼬리치는 꾀꼬리처럼 가볍게 씹는다.
3 인술제중
병원에 환자가 많아지면 수가를 올리고 고급화하는 경향이 많다. 30여년 전 대구의 유명한 모 치과는 수가가 높기로 소문나 있었다. 보통 치과에서 크라운 한 개당 7만원을 받을 때 25만원이나 받았다. 서울의 모 대학교 학장을 지내신 분이 개업을 했을 때도 틀니를 웬만한 시골집 한 채 값을 받고 해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에게 이렇게 환자가 많은데 수가를 배로 올리고 편안히 진료를 하라고 권하는 친구도 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병원을 더 키울 마음은 있지만, 진료비를 올려 받을 마음은 없다고 했다.
사실 치과 의사는 그 직업의 생명이 그리 길지 못하다. 치아라는 특수성과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직업이어서 40대 초반에 정점을 이루며, 40대 후반부터 환자가 줄어들거나 환자를 줄인다. 50대가 되어 치과를 확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난한 시골에서 자란 나로서는 소수의 부르조아를 위해서만 진료를 하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
‘인술제중’이라는 말이 있다. 의술은 대중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결코 소수의 부유층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 나는 앞으로 진료에 임할 때 내가 가난하게 자랐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 그리고 아직도 나의 주위에는 부자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많음을 간과하지 않겠다.
4 친절은 기술에 버금가는 덕목이다.
누구나 친절히 대하라는 교육을 받으며 친절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분명 더 친절한 사람이 있고 덜 친절한 사람이 생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능동적으로 다가가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저 멀리서 어떤 사람이 무엇을 찾고 있을 때 그냥 지나칠게 아니라 달려가서 도와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는 개업 전에 무의촌 진료 때 쓰는 작은 손모터를 가지고 치아 보철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기계도 좋지 못했지만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러 몇 년이 되지 않아 보철물이 탈이 나서 그 환자는 다시 나의 치과를 찾아 왔다. 나는 ‘몇 년 못 가서 탈이 날 정도로 보철치료를 잘못해 주었는데 왜 또 저를 찾았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더니 그 환자는 대답했다.
“그때 참으로 친절했기 때문에 잊을 수 없었습니다. 실력은 공부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술보다 친절을 더 중히 여긴다는 이 환자의 말을 나는 그 이후부터 평생잊어본 적이 없다.
나는 맹세했다.‘내가 아무리 괴롭거나 기분이 언짢아도 환자에게 친절히 대하리라’
5 환자의 불편한 곳에 뭔가 해줄 것이 있다.
이미 치료가 끝난 환자가 다시 병원 문을 들어서면 ‘뭐가 잘못 되었나’, ‘어디에 불편한 곳이 있나’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나는 환자가 다시 찾아오면 참으로 기분이 좋다. 불편한 곳에 내가 뭔가 해줄 것이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때로는 전혀 의사가 치료할 것이 없는 것처럼 판단될 때도 있다. 그러나 일단 환자를 치과의자(Unit Chair)에 앉히고 잘 관찰한다면 반드시 해줄 것이 있다.
치아도 늘 움직이고 있다. 아픈 이를 조금만 갈아줘도 아프지 않는 경우가 많다.
레이저 치료 한 번만 해줘도 통증이 가라앉는 경우가 많다. 어제 사랑니를 발치한 환자가 오늘 통증이 심한 것을 나에게 불평하면 나는 무조건 의자에 앉히고 실밥을 빼줘 본다. 실이 당기지 않으면 통증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가 불편해 하는데 ‘좀 기다려 보시오. 좀 참으세요’라는 대답은 최악의 대답이다.
치과 의사가 10분간 정성을 더 들이면 환자는 10년간 더 편안하게 쓸 수 있다. 환자가 불편해 하는데 그냥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주지 않고 마냥 기다려 달라는 것과 똑같다. 의사가 노력한다면 대부분의 불편은 없어질 수 있다. 혹시 기다려야만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불편한 이유와 예후를 차근차근 자세히 설명해주면 환자는 이해를 하고 안심을 하게 된다.
<다음에 계속>
http://www.chihak.co.kr/news/1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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