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소멸은 영혼의 탄생으로 이어져 가슴에 살아
봄의 믿음이 있듯 의연하게 기다리는 나목의 의지를
이 영 만
은평치과원장
시인·작사가
前대한치과의사협회 기획이사
습관처럼 새벽에 깨어나 어둠 속을 걷는다.
어머니의 발걸음이 무수히 찍혀 있으며 손길이 곳곳마다 머물렀던 농장의 구석구석을 걷는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어머니의 체취가 묻어나는 듯하다.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나직하게 동요를 불러 본다.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 / 겨울바람 때문에 꽁! 꽁! 꽁! / 손이 꽁꽁꽁 꽁! 발이 꽁꽁꽁 꽁! / 겨울바람 때문에 꽁! 꽁! 꽁! / 어디서 이 바람은 시작됐는지 / 산 너머인지 바다 건넌지 / 너무너무 얄미워 /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 / 겨울바람 때문에 꽁! 꽁! 꽁! / 손이 꽁꽁꽁 꽁! 발이 꽁꽁꽁 꽁! / 겨울바람 때문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로였어도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었던 어린 날의 어머니. 필자의 언 손을 녹여주던 어머니의 체온이 느껴져 울컥 눈물이 솟아난다. 고향 선산에 어머니를 묻은 지 두 달이 지났건만, 아직도 어머니는 이 농장을 감싸고 부는 바람과 더불어 떠돌고 계신 것 같다. 아니, 나의 가슴 속에, 나의 추억 속에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다정하게 웃고 계신다.
발인하는 날 새벽에 마지막으로 영정 사진을 모시고 이 농장을 돌 때, 나의 가슴에는 그야말로 주체하기 힘든 겨울바람이 몰아쳤다. 쇼팽의 ‘에튀드 겨울바람 Op.25 No.11’에서 느끼는 광풍의 파도였다.
벽제 화장터에서 두 시간 만에 한 줌의 하얀 가루가 된 어머니의 육신을 품을 때 필자의 가슴은 오히려 조용한 눈물과 함께 진정이 되었다. 비로소 어머니의 죽음이, 어머니와의 이별이 차분하게 몸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 어머니의 모든 삶이 나의 세포와 의식 속에서 새롭게 이식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모자의 혈육은 그렇게 승화되어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육신의 소멸은 영혼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니까. 어머니는 필자가 지은 노랫말처럼 내가 지상의 삶을 다하는 날까지 나의 가슴에 살아계실테니까.
‘어두운 밤하늘에 홀연히 뜨는 저 별은 / 꽃 같은 별이던가 별 같은 꽃이던가 / 보릿고개 눈물고개 모질게 넘기시고 / 흙이 좋아 흙에 묻혀 살던 어머니 / 얼굴선이 / 아직도 고우신 어머니 / 허리는 기억자로 굽으셨네 / 모정에 슬픈 강물 가슴에 흘러 흘러 / 눈물도 보석이 되었네 / 아 아 많이 야위신 어머니 살아 계서서 행복해요 / 아무리 불러도 / 포근한 당신에 이름이여 / 어머니 어머니 사랑합니다 어머니’(‘모정’ 남진 노래, 이영만 작사)
전라도 완주 선산에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어머니를 향해, 그리고 필자의 지인들을 향해 마지막 편지를 썼다.
‘어여뿐 소녀가 마침내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어머니 길 떠나신 날, 하늘도 울었나 봅니다.
한겨울 안개 바람 속에서 고요히 떠나신 어머니. 아무것도 손에 쥔 것 없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허무한 인생길, 지난 세월 돌아보니 한순간 꿈이었군요. 어머니와 함께한 희로애락의 순간순간들이 한날의 꿈이었습니다. 소녀 어머님이 떠난 빈 자리를 어찌 감당해야 할까요. 천국의 하늘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맘껏 떠도시더라도 제 꿈속에서 안부 전해주세요.
부디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 52년 전 먼저 가 계신 아버님 손잡고 편히 잠드셔요.
꽃처럼 어여쁘신 소녀 어머니, 잠든 모습이 너무 이뻐요. 사랑합니다, 나의 어머니, 영원토록 그리워 할 나의 어머니.’
동쪽 새벽하늘이 붉어지며 서서히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오늘의 태양이다. 거센 바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어둠을 걷어내며 고요한 숲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바싹 마른 억새는 서로 몸을 부비며 서걱대고 하늘 향해 치솟은 참나무는 벌거벗은 채 휘청이고 있다. 주검의 그림자만이 일렁이는 이 겨울 숲에도 멀지 않아 봄바람이 불면 새로운 생명의 움이 솟아나겠지. 그것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그 순리 속에서 우리는 또 희망을 갖고 생의 의지를 가다듬는 것 아닌가. 고 박완서 작가의 소설 ‘나목’의 끝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의 여인들. 여인들의 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었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우리는 저마다 숲속에 홀로선 한 줄기 억새이며 한 그루 나목이 아닐까. 어머니에 이어 누이와 동생마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올 겨울의 혹독한 찬 바람 속에서 나는 그야말로 나목이었다.
그러나 봄에의 믿음을 가지고 나는 노래하리라. 그대와 여러분과 더불어 노래하며 봄을 맞이하리라.
‘여러분 덕분에 당신 덕분에 /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여러분 덕분에 / 뭐 그리 잘난 것도 잘난 것도 없는데 /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 무너지고 쓰러지고 / 주저앉고 포기하고 싶을 때 / 사랑의 이름으로 울분의 세월을 견디며 / 마음을 다스리며 살았네 / 폭풍 같은 사랑으로 버팀목이 되어준 / 여러분 덕분에 당신 덕분에’ (‘덕분에’ 송대관 노래, 이영만 작사)
쟈니리 ‘바보사랑’/ 조관우 ‘엄마의노래’/ 강진 ‘족두봉’/박건 ‘봄비연가’/김태희 ‘해운대사랑’ 등 30여곡의 대중가요를 작사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 다음호는 하 상 윤 원장님이 맡습니다 >
http://www.chihak.co.kr/news/16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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