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興 雨
이흥우치과의원 원장, 哲博
무언가 만나 몰입할 때, 우리는 무아지경에 빠져 주객일체가 된다. 별을 보다가는 별이 되고, 음악을 듣다가는 멜로디가 되고, 꽃을 보다가는 꽃에 묻힌다. 자신의 짝을 찾아 사랑할 때, 절경의 자연 속에 놓이거나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생각의 나래를 펴거나 예술을 할 때, 땀 흘려 환자를 볼 때 우린 자존감을 느끼며 행복해한다. 내가 어디에 있건 내가 누구인지 상관없이, 나는 그 자리에서 생생히 살아있다고 느낀다. 존재감을 느끼는 것은 나의 진수를 대면하는 것이고, 대상과 어긋남이 없이 함께 있을 때 나는 행복했다.
불가에선 모두가 하나라 하고 메를로 퐁티는 세계와 우리가 같은 옷감으로 짜여있다지만, 보통 사람으로선 한 점 빅뱅에서 나온 별과 우리가 태초로부터 멀어진 시간과 떨어진 거리만큼 서로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도 이따금, 별을 바라보거나 우물을 내려다보면 한없이 끌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고, 폭포 아래를 보면 아찔하여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도 받는다. 별에 하염없이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은 별 원소와 내 원소가 같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공감하는 것이고, 깊은 우물 아래의 아득한 느낌은 탯줄까지 이어지는 생명 근원에 맞닿은 원초적 인식일 수도 있다.
사람을 만나거나 자연과 일을 만날 때, 우린 사랑에 빠지고 예술과 철학에 빠진다. 무언가 나와 다른 것을 제대로 만날 때, 신기하게도 우린 거기서 자신을 힐끔 보기도 한다.
처음엔 전혀 모르던 낯선 이를 만나 사랑하게 될 때나 낯선 장소를 여행할 때, 우리는 진정 살아있음을 느낀다. 생경한 표정은 살아 빛나고 낯선 풍물은 생동감으로 넘쳐, 시간은 활력으로 가득 차 하루가 영원처럼 온전히 느껴진다. 사랑하고 여행하면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새날처럼 맞고, 나와 다른 대상들을 본래 모습 그대로 느낀다. 그리하여 그동안의 낯익은 ‘나와 세상’은 사라지고, 낯선 ‘나와 세상’이 등장한다. 낯선 것은 마침내 제 존재를 드러내어 새 대상으로 거듭나고, 나는 상큼한 감성으로 다시 태어나 온 존재를 새롭게 느낀다. 낯선 거리만큼 떨어져 있던 대상을 순간 ‘나와 한 존재’로 보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낯선 것을 만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때 감성역량이 최대한 발휘되고 또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손쉽게 탈피되기 때문이다. 여행할 때 우리는 전혀 의도치 않은 상황에도 던져져서, 주변과 소통하거나 곤란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손짓과 발짓, 그리고 온갖 몸짓을 다 해야 한다. 우리말은 이제 아무 소용이 없고, 지위도, 명예도, 모든 꺼풀을 벗은 맨몸의 내가 낯선 외국인으로 외딴 거리에 서 있다. 컴퓨터를 재부팅 하듯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이럴 때 감성은 아이처럼 싱싱해지고 더 강력해져서, 공작놀이를 하듯 새로운 세상의 찰흙으로 거침없이 새로운 형태의 나를 빚는다.
예술을 하며 놀거나 사색하고 일할 때, 우리는 자신을 보기보다 차라리 자신을 잊는다. 내가 어떠하다는 구태의연한 미몽에서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전부 비워진다. 백지의 내가 됨으로써 무아(無我)가 된다. 기존의 ‘나’라고 여겼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 한껏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나’라는 빈 도화지 위에 새로운 예술과 철학과 땀의 세계가 각각의 물감으로 칠해진다.
예술과 철학은 세상과 나의 교감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매체이다. 예술은 대체로 감성 능력을 많이 사용하고 철학은 이성 능력을 많이 사용한다. 사고는 대상을 한정하지만, 유연하기만 하면 철학은 자유로운 사유와 상상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연해져서, 우리는 무(無)에서 유(有)를 본다. 나의 감각이 신체의 한계 내에서 외부 세계를 지각하게 하듯, 철학 또한 사고라는 틀 안에서 나를 문득 보게 한다. 이때 시공은 태초 한 점으로 회귀하여 멀어졌던 주객(主客)이 합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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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세이 ‘우리는 누구인가’의 12차례 소주제가 아래처럼 이어집니다.
7. 원래 내 생각은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생각에 갇혀 있다
8. 세상과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단세포처럼 아이처럼 예술가처럼
9. 물리적 존재와 심리적 존재를 잇는 징검다리, 과학과 인문학의 통섭
10. 나는 무엇을 만나서,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11.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고, 글쎄 나는?
12. 안다는 것과 산다는 것, 하늘에서 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