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생포해 인질로 삼고 부족 간 갈등으로 우군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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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루 리마의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바실리카 대성당 |
남미에 가기 전에 잉카는 제국의 국호인줄 알았지, ‘8대 잉카 비라코차’처럼 왕호를 일컫는 말인 줄 몰랐었습니다. 아직도 흔히 잉카제국이라고 말을 하지만, 잉카제국의 정식 명칭은 타완틴수유입니다. 4개의 땅이 합쳐진 것이라는 뜻인데, 동쪽 안티수유, 서쪽 쿤티 수유, 남쪽 쿠야수유, 북쪽 친차이수유를 통일하고 이룬 이름이고, 그 수도였던 쿠스코에는 4방향의 옛길(잉카 트레일)이 있습니다.
잉카는 1300년경 건국되었습니다. 아직도 석기시대를 살고 있었기에 건국도 매우 늦게 되었습니다. 100년이 지난 8대 잉카 비라코차에 이르러 주변 부족을 정복하며 성장을 하기 시작하였고, 자신만만해진 비라코차는 북쪽의 창카족을 정복하러 갔다가 오히려 상황이 역전되어 수도인 쿠스코가 포위되었습니다. 왕과 장자가 수도를 버리고 탈출하였지만, 둘째 아들 쿠시 유판키는 남아서 흩어진 병사들과 백성들을 모아 다시 창카족을 물리치고 안데스 고원을 통일하였습니다.
쿠시 유판키는 ‘세상을 발칵 뒤집는 자’라는 뜻의 파차쿠티로 명명하고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1463년 아들에게 잉카를 물려주고 세상의 중심인 쿠스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춘 인구 25만의 제국도시가 되었고, 나중에는 100만 도시가 되었다고 하니, 쿠스코의 크기는 당시에는 세계적인 도시였음에 틀림없습니다.
12대 잉카 와이나카팍은 북쪽에 이상한 사람과 배들이 출몰한다는 보고를 받고, 장자인 니난 쿠요치를 대동하고 지금의 콜롬비아 쪽으로 순행을 떠났습니다. 여기서 잉카 부자는 천연두에 감염이 되어 갑자기 사망하게 되고, 잉카제국은 심각한 내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신흥세력인 아타우알파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마지막 잉카가 되었지만, 피사로에 의해 생포되었고, 많은 국민들의 외면을 받으면서 처형당하게 되고 잉카제국도 문을 닫게 됩니다.
1524년 스페인 탐험가 피사로는 첫 항해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지만, 원주민에게 황금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했습니다. 2년 뒤 두 번째 항해에서는 파나마 총독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요 섬에서 7개월을 버티다 구조되었지만, 이때 잉카에 대한 정보와 실체를 파악했습니다.
1530년 12월 168명의 원정대와 함께 피사로는 3차 원정을 떠나 1531년 5월 둠베스에 상륙하고 가만히 지켜만 보다가, 내전에서 승리한 아타우알파가 쿠스코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추적합니다. 11월 아타우알파에게 면담요청을 한 후 만났을 때, 발베르베 신부는 복종요구서를 낭독한 후, 신의 말씀이 들어있다며 성경을 드렸습니다. 아타우알파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며 성경을 집어던지고, 이 신호를 기다리던 피사로와 원정군이 아타우알파를 생포하게 되었습니다.
피사로가 잉카로 가기 전, 멕시코 아스테카 함락에 성공한 코르테스를 찾아가 성공비결을 물어보았는데, “왕을 생포해 인질로 삼고 부족 간 갈등을 부추겨 우군을 만들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피사로는 스페인 왕실과 수입의 8대2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에 따라 원정대가 챙긴 금은 5,720kg이었고, 원정대에게 나눠주고 피사로 본인은 200kg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분배에 불만을 품은 알마그로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고, 그 부하가 피사로를 암살했고, 발베르베 신부는 되돌아오는 길에 배가 좌초되어 식인종들이 있는 섬에 상륙하여 나무에 꿰어 불에 그을려 죽었다고 하니, 황금을 쫓은 이들의 말로가 비참하였습니다.
조남억
연세조아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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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당 안에 있는 피사로의 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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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카의 수도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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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으로 뒤덮여있었던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