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재 의
대한치과의사학회 고문
前협회사편찬위원장
◆치과의학회의 설립과 활동
(1) 치과의학회의 설립과 변천
조선치과의학회는 1919년 10월 조선에 있는 일본인 치과의사들이 치의학의 연구 및 그 진보, 권익 그리고 친목을 위하여 만들었다. 이전에 일본인 치과의사들은 다른 의사들과 함께 조선의학회에서 활동해 오다가 일정한 수의 치과의사들이 모이자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 나라자끼 도오요오(楢崎東陽)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가 발기인이 되어 치과의사들의 자문을 얻어 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이 치의학 분야에서 학술단체의 시초가 되었다.
조선치과의학회는 창립 시 서울 회원 12명을 포함하여 전국에 30명 정도의 회원이 있었다. 그 후 회원은 매년 증가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구락부에서 총독의 오찬을 대접받은 후 촬영한 창립 사진에는 23명의 얼굴이 보인다.
처음 회장으로는 총독부의원 치과에 근무하던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가 되었고, 임원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한국인 임원은 미미한 수준으로 1927년 접대계에 안종서(安鐘書) 연회계에 함석태(咸錫泰조동흠(趙東欽) 1928년 접대계에 안종서, 연회계에 함석태․김연권(金然權) 1930년 지방위원 한동찬(韓東燦)이 참가했을 뿐이었다. 학회에서 발표한 한국인은 27명이며, 486개의 연제 중에서 약 15%인 75개를 발표하였다. 한국인으로 조선치과의학회에서 제일 먼저 발표한 사람은 유창선(劉昌宣)으로 연제는 ‘전신적 질환의 구강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반태유(潘泰收)와 배진극(裵珍極)의 글은 후에 박사학위 수여에 일조하는 논문이 되기도 했다.
총회는 년 1회 열렸다. 1923년 관동대지진과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의 양행(洋行),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임시 중지되었을 뿐, 총 21번의 총회가 열렸다. 1925년경 회가 빈약하여 경비는 안내장의 인쇄비, 우표값까지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가 지불하는 상태였다.
1930년 총회에서 이꾸다 싱호(生田信保)가 총회비 징수를 문제화시키면서 나기라 다쓰미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총회의 분위기는 임원선거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나기라 다쓰미 회장은 신진인 사와 야마이(澤山居)를 추천하고 사임하였으나 회장에 미시나 케이키치(三品敬吉)가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일들은 조선치과의학회의 운영이 나기라 다쓰미에서 이꾸다 싱호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1932년 이꾸다 싱호가 회장이 되었다. 이후 조선치과의학회의 주 구성원은 경성제국대학과 경성의학전문학교 치과의사 및 개업 치과의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