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재 의
대한치과의사학회 고문
前협회사편찬위원장
1905년 12월 20일 일제는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하고, 이 기구를 침략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또한 이사청을 통해서 한국으로 일본인 이주를 장려하는 실정이었다. 1906년 일본은 치과의사법을 제정하고, 입치사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일본인 입치사들은 통제가 없는 한국으로 이주했다. 1907년을 전후하여 한국에 있는 입치사는 10여명이고, 이에 비해 치과의사는 4~5명 정도며, 1920년대 초반에는 입치사 200여명에 치과의사 20여명 정도였다.
일제는 의료관계법령을 제정·공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1913년 말 치과의사규칙을 의사규칙, 의생규칙과 입치영업취제규칙 등과 같이 제정·공포하게 되었다. 입치사에 대한 제도는 1913년 12월 25일 입치영업취제규칙이 제정&공포되었다. 이로써 입치사의 허가조건이 강화되고, 입치영업의 한계와 광고&분쟁을 제한하였다. 입치사의 진료 한계는 입치와 발치에 한 했으며, 응급치료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그들의 침략정책에 동참한 입치사들을 제한하지는 않았다. 입치사 허가는 무제한적이었고, 단속도 관대하여 자유롭게 치과진료를 하게 했다.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치사와 치과의사 사이에는 잦은 마찰이 발생했다. 이것은 일본 내에서는 허가하지 않는 입치사를 한국에서는 허용하는 일제의 모순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늘어난 입치사의 수는 치과의사의 수보다 많았다. 그러나 입치사에 의한 보철이 보편화되자 좋지 않은 풍조가 생기게 되었다. 한국인의 양환 구강 상태를 버려놓게 된 것이다. 한국인은 금으로써 보철하는 것을 기피하였으므로 대개 의치(義齒)의 고리조차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백금을 사용하곤 했다. 의치를 장착한 사람도 의치가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이와 같이 한국인은 보철하기를 기피했다. 그런데 심각한 유행이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의 민중의 구강위생사상은 전연 없었고, 소위 돈푼이나 있는 부자, 또는 모양내는 멋쟁이, 또는 기생들이 보건 목적이 아니라 장식적 목적, 즉 장식도구로 알고 뻗내기 위하여 중절치 측절치 등 건전한 치아에 금으로 전부 금관 또는 개면금관을 해씨우고 뻔적뻔적 거리며 다니는 것이 현재 ‘다이야’반지나 끼고 다니는 정도로 유세하였고 일대 유행이 되었다. 이 유행은 상당한 시일 근 20년간이나 그러한 악풍이 있었다.”
즉 구강위생은 고려하지 않고 장식용으로 보철을 하는 풍조가 생긴 것이다. 노다 오지(野田應治)치과의원에 투석하던 시기 이후 불과 10여년만의 일이었다. 입치사들이 주도하던 20여년간 이러한 풍조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뿐만 아니라 양적인 팽창에 비해 진료에서는 불량 보철을 시술하는 등의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 즉 입치사들이 치료한 치아가 결과적으로 좋지 않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제는 입치사 문제를 보고 있을 수 없게 되자 치과의사시험제도를 마련하였다. 일제는 입치사를 구제할 방법으로 시험을 통해 치과의사의 자격을 획득하도록 했다. 1921년 2월 14일 치과의사시험제도는 총독의 주치의였을 뿐 아니라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인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의 건의로 제도를 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