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재 의
대한치과의사학회 고문
前협회사편찬위원장
◆ 한국인에 의한 치의학
한국인도 치과의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한국인 입치사는 치과의사보다 먼저 등장하였다. 한국인 최초의 입치사는 최승룡이었다. 그는 1907년 종로에서 개업하였다. 기술의 전수자는 명료하지 않으나, 노다 오지에게서 배웠으리라 추정되기도 한다. 이어서 1907년 안중수가 개업을 하였고, 1908년에는 김한표, 김경집 그리고 김한표에게서 배운 신정휴도 개업하였다. 1909년 개성의 임순철은 ‘대한치과병원’이라는 입치사로서 치과병원 개업안내를 하고 있다. 그는 평양에서 개업하던 오오제키 카네키라는 일본인 치과의사에게 사사하였다.
이들은 일본인 치과의사의 치과진료보조로 고용되어 서양 치과의술을 배워 입치업을 개설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입치사는 치과의사가 배출되기 전까지 과도기적으로 근대의학을 수용한 치과의료인이라 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뿐 아니라 입치사는 사회적으로 우대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수입도 상당했다. 이러한 입치사의 등장은 치과의사 제도가 마련되기 이전이었다.
한국인 치과의사는 치과의사제도가 마련된 후 등록되었다. 1914년 2월 5일 함석태는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로 등록하였다. 그 후 일본에서 치과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 치과의사시험제도 합격자와 경성치의학전문학교에서 졸업생이 나오므로 치과의사 수는 증가하게 되었다.
1926년경의 한국인 치과의사 생활수준은 중상위권이었다. 한국인 치과의사 수입은 경성제대 졸업자의 봉급보다 많았다. 이호곤의 경우 1926년 진남포에서 하루 평균 12명 정도의 환자를 진료했는데, 그의 진료 내용은 발치, 치료, 보철로 크게 나누어진다. 발치료 50전, 치료비 20전, 금관 3-4원, 총의치 15~20원이었다.
이후 이호곤은 1935년 평양으로 개원지를 옮기며 시설도 확장하였고 월수입은 300원 이상으로 생활수준은 상류였다. 그의 진료 내용은 발치, 치료, 어느 정도 분화된 보철 치료를 볼 수 있고, X-ray 촬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루 평균 20명 정도를 진료하여 발치료 80전~1원, 치료비 30전, 금관 5원, 총의치 15~30원, X-ray 1매 50전이었다.
3. 제도와 교육
(1) 제도
치과의사와 입치사는 별다른 구분이 없었다. 치과의사와 입치사들이 별다른 구별 없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제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10년 9월 총독부 경찰국에 위생과를 설치하고 의료인 및 모든 위생업무를 관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0년 신의주에서는 경찰서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자, 즉 치과에서 조력한 경력증명서만 가지고도 입치업을 허가하는 실정이었다. 일제는 일본에서 폐지된 입치사를 한국으로 이전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1905년 12월 20일 일제는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