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재 의
대한치과의사학회 고문
前협회사편찬위원장
매년 시행하기로 한 시험자격은 수업 연한 3년 이상의 치과학교 졸업 또는 5년 이상 치과의술을 수업한 자가 시험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치과의사시험제도의 주목적은 입치사를 구제하여 의료기관이 적은 지방에 배치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치과의사시험의 난이도가 더 높아 입치사는 입치사로 남게 되었다. 때문에 치과의사들과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
시험에 합격하는 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한국인은 소수였다. 1921년 10월 9일 처음으로 치과의사시험이 실시되어 고상목(高相穆)이 합격하였다. 국내에서 최초로 배출한 치과의사가 된 것이다. 1922년 9월 13일 시험에서는 배진극(裵珍極) 이성모(李成模) 변세희(邊世熙) 이상철(李相喆) 유창선(兪昌宣) 등 5인이 합격했으며, 1923년에는 총독부의원 치과기공실에 근무하던 김연권(金然權)이 합격하였다.
1913년 11월 15일 치과의사규칙이 발표되고 1914년 3월 1일부터 법령이 실시되었다. 즉 한국에서 치과의사가 되려면 치과의사규칙에 따라 조선총독의 면허를 받아야 했다. 치과의사규칙이 발표된 후 그해 12월 11일 치과의사규칙에 따른 취급수속이 제정되어 치과의사의 업무가 의사, 의생와 같이 경찰에서 취급하게 되었다.
이 치과의사규칙에 의하여 치과의사 면허 제1호로 등록된 치과의사는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함석태(咸錫泰)였다. 그는 1914년 2월 5일 치과의사 면허를 허가받았고, 그해 3월11일 관보에 게시되었다. 1914년 6월 함석태는 개원하였고, 이후 1917년 한동찬(韓東燦)이 동경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개업하였고, 1919년 김창규(金昌圭)가 동양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광화문에서 개원을 하였다. 1921년 이희창(李凞昌)이 함석태와 같은 학교인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무교동에서 개업했다. 또 이희창보다 1년 후배인 임택룡(林澤龍)이 1922년 세브란스 병원 치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개업이 힘들자 1924년 한국인 치과의사로는 함석태 한사람만 개업하고 있었다.
◆ 교육
가. 교육의 시도
일제의 교육정책은 그들의 식민지 통치와 관련이 깊다. 일제는 치과의사의 교육이 관심 밖의 일이었으므로 서양인에 의한 치과의학교 설립을 무산시켰다. 1909년 7월 서울에서 치과의사 한대위(韓大衛, David Edward Hahn, 1874-1923)는 치과의학교 설립 계획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의교 창립이라는 기사와 논설, 그리고 ‘한국평론(The Korean Review)’에 기록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제는 한대위의 치과의학교 설립안을 무산시켰다. 일본은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할 계획이 없을 뿐 아니라 제중원의 의학교육에 이어 치의학 교육에 있어서까지 미국에게 기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이 치과강습소를 열고 치과교육을 하기에 이른 것은 1913년경이다. 그해 5월부터 8~9개월간 ‘민제병원에서 치과강습소를 연다’는 광고가 보이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치과의료기관에서 5년 이상 수업한 후에야 입치사나 치과의사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되므로 이러한 강습소를 개설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그 강습소의 교육 내용이나 시설, 배출된 학생과 진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