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재 의
대한치과의사학회 고문
前협회사편찬위원장
치과의사회를 법정치과의사회로 변화시키려는 것은 허구였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성은 지도층에 있었던 일본인 치과의사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법정치과의사회를 설립하려 할 때 일본인 치과의사들의 시각은 총독부의 관리에서 벗어나 내무성 직할로 관리되도록 제도를 개혁하여야 한다. 내무성 직할로 될 때 한국인에게 참정권과 대의원 선출권을 줄 수 없는 등 복잡한 문제가 연루된다는 것이었다.
1942년 10월 1일에 경성치과의사회(京城齒科醫師會)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총회는 의료계나 치의학계의 중진이 모두 참석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회의 구성은 회장 1명, 부회장 2명, 이사장 1명, 이사 약간명, 평의원 10명을 두도록 했고, 회장은 회무를 총리하고 본회를 대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통합은 두 회의 대등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 치과의사에 의한 일방적인 통합이었다. 임원 18명 가운데 한국인은 5명으로 1/3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일본인 위주의 임원이 구성된 것이다. 1925년 창립 이래 한국인만의 독자성을 유지 발전시켜 오던 한성치과의사회는 경성치과의사회의 속으로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한국인 치과의사들은 단체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치과의사회의 활동
치과의사들이 전개한 활동으로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충치 예방 활동이었다. 지역에서 행하던 충치 예방 활동은 1928년 6월 4일 제1회 ‘충치예방의 날’은 각 치과의사회, 문부, 내무성의 지원으로 전국적인 규모의 행사로 발전하였다. 행사는 무료로 강연자료, 포스터, 팸플릿 등이 배포되었고, 포스터, 팸플릿, 셀로판, 타이틀 슬라이드, 만화, 레코드 등은 각 치과의사회에서 구입하도록 하였다. 각 치과의사회는 가사 가곡의 제창, 종이연극, 쇼윈도우의 장식, 강연회, 영화회, 라디오방송, 신문, 잡지, 입간판, 현수막의 이용, 표어 기타의 모집, 각종 치과위생교련, 전람회표창, 치과건강상담소, 무료치과진료소의 개설 등 각 지방 실상에 맞는 사업을 실시하도록 했다.
1937년 이후 이러한 충치 예방 활동까지도 일제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국민정신총동원의 취지에 맞게 전 국민을 위한 표어를 제정하고, 이 표어에 맞게 치과위생 지식 보급과 더불어 실천하도록 하였다. ‘바른 치열에 빛나는 건강’(1937), ‘치아의 애호에 빛나는 체위’(1939),‘건민 건병 흥아의 초석’(1942) 등의 표어로, 국민정신총동원의 강령인 국민체위향상과 일반민중 보건위생의 취지에 맞게 실시되었다. 이 시기에 특징 있는 행사는 치마교련(齒磨敎鍊)이었다. 이것은 군대 훈련의 한 방법인 교련을 이닦기에 도입한 것으로 군국적인 요소가 가득 찬 합동체조, 행렬, 합창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34년 1월 일제가 불안정한 금값으로 금 수출 금지를 하였다. 이에 따라 치과의사들은 치의학계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한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