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재 의
대한치과의사학회 고문
前협회사편찬위원장
1924년 4월 임상실습을 위한 총독부의원 안에 10평 정도의 치료의자 5대를 갖춘 진료실을 만들었고, 6평 정도의 기공실도 설치했다. 진료실에는 오카다 타다시(岡田正)야오 타로(失尾太郞)가 임상실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 후 나기라 다쓰미에 의해 1924년 10월 황금정(을지로)의 일본생명 빌딩 일부를 차입하고 시설과 장비를 정비하였다. 1924년 10월 부속병원은 처음에 주임 후구이 마사루(福井 勝)체제로 운영하다가 노자와 킨(野澤釣)이 부임하고 원장이 되어 병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1925년 4월 15일 경성치과의학교 제1회 졸업생 한국인 23명, 일본인 4명 모두 27명이 치과의사로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경성치과의학교는 8회의 졸업생 176명을 배출하였는데 한국인은 103명으로 59 %을 차지하여 한국인이 많은 편이었다. 그 통계는 다음의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교사의 건축에는 일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 공사비는 우선 식산은행에서 십만원을 차입하고, 나머지는 토지의 무상 양여로 받아 이것을 담보 삼아 십오만원을 차입하여 교사를 신축하였다. 1927년 6월 6일 건축에 착수하여 낙성식은 1928년 9월 29일 거행되었다.
교사 신축 후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1928년 10월 2일 경성의학교는 재단법인 경성치과의학교로 인가되었다. 1929년 4월 15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京城齒科醫學專門學校)는 4년제로 개교하였다. 1931년 3월 13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일본 문부성 지정학교로 인가되었다. 1934년 7월 10일 학칙을 개정하여 남녀 공학제가 폐지되었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의 교육 목적은 전문적인 치과의학 교육과 황국신민을 연성함에 있었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의 수업 연한은 4년이었고, 생도 정수는 480명이었다. 전문학교로 승격한 후 생도수가 늘어남에 따라 많은 수의 일본인 학생들이 입학하였다.
전문학교로 승격할 때의 교수진은 임상에서는 보존학, 보철학, 구강외과학, 교정학, 치료학 그리고 기초에서는 치과기공학, 병리약리학, 병리조직학으로 체제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후 교수진은 보강되어 1930년경 76명이나 되었다.
나기라 다쓰미는 치과재료학의 강의는 치과재료의 각 종류에 걸쳐 연구 제조하는 전문가가 강의하는 편이 이상적이라 생각하였다. 1931-1932년경 쇼오후우 켄지(松風憲二)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명하였고, 그는 매년 2월 1주간 머물면서 1년 분의 강의를 1944년까지 강의했다. 이러한 일로 일본의 각 대학에서도 쇼오후우 켄지(松風憲二)와 미야츠 하지메(宮津一)에게 재료학의 강의를 의뢰하기도 하였다.
교과과정은 일본의 치과의학전문학교와 별 차이가 없었고 독일 치의학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교육이었다. 실제로 독일어 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했다. 4학년 임상실습은 매우 엄격하였고 증례제도로 운영되었다. 환자의 수나 경제력 등으로 실습을 모두 마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