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재 의
대한치과의사학회 고문
前협회사편찬위원장
1935년 9월 25일 한국인만의 치과의사회인 한성치과의사회가 조선연합치과의사회에 가맹하였다.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한성치과의사회의 조선연합치과의사회에 가맹하는 것은 수개월 전부터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었고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연합치과의사회에서는 한성치과의사회가 가입할 예정이라는 것을 미리 발표하며, 한성치과의사회가 서울에 있는 한국인들의 모임으로서 1925년에 발족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가맹한 이유는 1928년 과거 평양에서와 같이 법정치과의사회가 곧 생길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한성치과의사회가 조선연합치과의사회에 가맹했으리라고 추정된다. 법정치과의사회는 조선연합치과의사회의 숙원사업의 하나였다.
이후 한성치과의사회는 한국인 치과의사를 대표하는 치과의사회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5년 6월 경성치과의사회의 간친회, 1936년의 충치예방의 날, 경성부치과의사회 25주년행사, 1937년 원단의 광고, 1937년의 충치예방의 날, 1937년 군사후원연맹가맹, 1939년의 경성치과용품조합 조합기 입혼식, 1941년의 치아와 건강전람회, 조선치과용품상조합이 상업조합령으로 발족할 때에 한성치과의사회는 경성치과의사회와 그 위치를 동등한 수준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이후 한국인 치과의사를 대표하는 치과의사회로서 한성치과의사회 함석태와 조동흠은, 평양치과의사회의 한동찬과 같이, 조선연합치과의사회의 평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1939년에 이르러 박명진(朴明鎭) ․ 박부영(朴扶榮)이 평의원이 되었다. 1940년에 최병지(崔丙智) ․ 이창용(李昌鎔) ․ 김찬규(金讚圭) ․ 김성도(金性度) ․ 김상문(金尙文)이 박명진 ․ 박부영과 같이 지방을 대표하는 평의원이 되었다.
시국 정세(時局 政勢)’는 치과의사회가 변화하는데 한 요인이 되었다. 1940년 3월 31일 조선연합치과의사회 총회에서는 도별 치과의사회 설립을 가결하였다. 도별 치과의사회 설립은 전국의 치과의사를 단결시킨다는 취지였다. 도별 치과의사회 설립은 각 도의 위생과에 의한 관권이 개입되었다.
이에 1940년 5월 12일 함경남도치과의사회가 설립되고, 약 5개월 후인 11월 23일까지 강원도치과의사회가 마지막으로 도별 치과의사회를 결성을 마무리했다. ‘시국 정세’로 인해 모든 치과의사들이 강제로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1940년 도별 회원수는 정회원 1,019명, 준회원(입치사) 188명으로 총계 1,207명이었다. 심지어 준회원으로 입치사까지 가입시켜 관리하게 했다.
1941년 3월 23일 조선연합치과의사회의 가맹회장 회의에서 조선연합치과의사회를 개조(改組)하여 종래의 각 지방 치과의사회는 도 산하로 들어가고, 그 후 각 지방 치과의사회는 자연히 소멸되도록 결정했다. 또한 1941년 5월 25일 조선연합치과의사회 총회는 ‘시대에 따라’ 합리적으로 회를 개조하며, 회 명칭도 조선치과의사회라고 다시 부르게 하였다.
도별 치과의사회 설립 이후 치과의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후생국을 신설하며, 1942년 2월 조선후생협회가 발족했다. 도별 치과의사회 설립 이후 치과의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것은 법의 집행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41년 조선치과의사회는 부회장을 1명 보강하여 조동흠이 선임되었으나 사망하고, 1943년 조선치과의사회 총회에서 부회장에 함석태가 보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