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오랜 고뇌 통해 섬세한 조각상을 설치”
신병인도는 바로 처형을 의미하는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 때 깔레市를 구하기 위해 6명의 시민이 스스로 나섰는데 그들은 결코 정치가나 군인이 아닌, 당시의 평범한 일반 시민이었다. 부유한 형편의 유스다-슈드생삐에로 라는 시민 한 명이 가장 먼저 자원하여 나서자, 뒤이어 어떤 부자지간이 함께 나서는 등 또 다른 여섯 명이 나서게 되어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다른 시민의 생명을 구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유스다-슈드생삐에로는 자결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신 중이었던 에드워드 왕비가 사람을 죽이면 나쁜 전조가 될 수 있음에 남편을 설득하고 탄원하여 여섯 명의 시민에 대한 처형이 취소되게 된다. 그들이 바로 깔레의 영웅이며, 이 부분이 우리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최연장자인 유스다-슈드생삐에로를 중심으로 5인을 배치한 조각상을 다시 살펴보면, 목에 밧줄을 매고 바지도 입지 않은 채 간소한 긴 옷을 입고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 특히 얼굴 표정과 인상에서 당시의 장중함과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제작 당시 구성이나 좌대 형식, 설치 방법 등에서 조각상을 의뢰한 깔레 市와 로댕의 생각이 서로 달라 1895년에 완성되기까지 11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으나 작가의 오랜 고뇌를 통해서 시청 앞 마당에 이 섬세한 조각상이 설치되었고, 이것이 바로 <깔레의 시민> 에디션의 그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일본으로 오게 되는 경위도 흥미롭다. 앞서 언급한 예술작품 수집가인 마쯔가타 코지로의 부탁에 의해 로댕 미술관의 지시로 <깔레의 시민>이 다시 주조된 것은 1919년부터 1921년이었다. 하지만 세계 1차 대전 직후의 혼란으로 인하여 마쯔가타 씨가 주문한 작품은 그에게로 가지 못하고 1920년대에 미국으로 매각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주조된 작품이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에 의해 쾰른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이 작품이 전쟁 후 파리의 품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현재는 로댕 미술관의 뜰에 전시되어 있다.
안 정 모
안정모치과원장 전치협부의장
속초바우지움조각미술관 설립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