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과 익산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무왕의 익산 건설의 배경
최근 쌍릉의 대왕릉의 주인이 무왕으로 밝혀지면서 쌍릉의 대왕묘의 공식 이름이 무왕릉으로 바뀌었다. 그뿐 아니라 제석사지 창건설화를 뒷받침하는‘육조 고일 관세음 응험기’에도 무왕이 익산(지모밀지 익산의 옛 이름)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미륵사지 창건 실화에도 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나오니 무왕과 익산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은 틀림없다.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부터 익산에 대규모 공사가 이루어지고 미륵사가 창건되었는데, 지금까지는 무왕이 기존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출생지인 익산을 발전시켰다는 주장이다. 또한 무왕 시절에는 현안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기에 신라 지역으로 진출하는 전략적 거점으로 익산에 국가 중요시설 건설이 꼭 필요했다는 견해도 나왔다. 그래서 미륵사를 짓거나 왕궁 등 국가시설을 지어 부처님의 힘을 빌려서라도 신라를 제압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국가의 권위를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백제 무왕의 익산 개발과 조선 정조의 수원화성 개발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장을 지냈던 이병호관장은 그의 저서 ‘백제 왕도 익산, 그 미완의 꿈’에서 “백제 무왕의 익산 개발 과정은 조선 정조의 화성 개발 과정과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익산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새로 개발된 지역으로 대왕묘와 소왕묘가 조영되었고 화성은 18세기 최고의 건축 기술이 집적된 신도시로 융릉(정조의 아버지 장조 곧 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능)과 건릉(정조와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의 능)이 조영되었다. 사비기 백제의 최고 기술이 집적된 익산의 위상을 고대사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생각할 때 조선시대 화성의 사례를 반드시 함께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익산의 지리적 조건
또한 익산은 대규모 투자를 할 만큼 지리적인 가치를 지닌 곳이다. 익산은 남으로는 만경강, 북으로는 금강이 흘러 풍부한 수량으로 농경 생활의 윤택함은 물론 서해로 나가는 수로를 통한 외부와 교류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라는 점이다. 그래서 청동기 시대부터 한반도에서 마한과 백제가 우수한 선진 문화가 다른 곳보다 먼저 유입될 수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이점이 될 수 있어 익산 일대가 금강의 관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이곳은 외국의 사신이나 물자들이 들어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서울과 인천의 관계로 보면 된다.
익산의 역할
익산 지역 학자들이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익산 천도설을 주장하시는 분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아직 추정에 불과하고, 지금까지는 수도인 사비를 물류 교류를 통해 지원하고 대외적으로 백제 왕권을 강화한 모습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대규모 공사를 통한 개발을 시도하지 않았냐는 추정이 대세이다. 최근에 왕궁리 왕궁터에서 무기 관련 시설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규모 왕실 공방이 발견되었는데 당시는 공방에서 생산된 고가의 물품들은 최고 보안을 유지하는 기술이었기에 왕실에서 직접 관리하면서 수도인 부여나 지방뿐 아니라 외국으로도 유통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도 익산
그러나 익산은 왕도가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인 통치 공간인 왕궁과, 통치 이념을 보여주는 미륵사지,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사후 공간인 왕릉, 그리고 방어 시설인 익산 토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익산이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인정하자, 익산은 대한민국 4대 고도(古都 경주, 공주, 부여, 익산)가 되었고,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모아 국립익산박물관이 개관(2020년)되면서 당당한 고도로써의 자존심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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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에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은 현대적인 시설과 근대 익산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전시만으로도 어느 국립박물관에 뒤지지 않은 질과 양을 갖추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