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유적 발굴조사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무왕 대에 익산 천도설을 주장할 때 미륵사지보다 중요한 곳이, 왕궁리유적이다. 하지만 이곳을 백제의 왕궁터로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1976년 원광대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에서 한 첫 왕궁리유적의 초기 발굴조사는 시굴 조사 성격의 간단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89년부터 시작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이며 1990년 부여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족하면서 이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초기 발굴조사
1990년부터 시작한 왕궁리 유적 초기 조사는 왕궁리 5층 석탑 주변에 먼저 관심을 두었고 그 뒤 성벽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졌고, 사원 관련 발굴에서 금당지, 강당지 부속시설로 추정되는 건물지, 기와 가마터 등이 확인되었다. 성벽 발굴조사에서는 성벽의 전체 형태, 크기를 알 수 있었고 문 터와 수구, 배수로가 발견되었다. 성벽은 상부가 남아있는 곳이 없어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웠고 성벽의 규모는 동벽 492.8m, 서벽 490.30m, 남벽 234.06m, 북벽 241.39m로 평면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덕국설
성벽의 윤곽이 확인되자 학계에서는 여러 주장이 나왔는데 보덕국설이 다시 제기되었다.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는 왕궁리 유적이 가진 성곽으로서의 한계를 부각하려 노력했다. 나지막한 구릉지를 둘러싸고 축조된 평지성이고 바깥에서 안쪽을 쉽게 살필 수 있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기에 그다지 적절하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었고, 성벽이나 건물지에서도 무기류가 발견되지 않아 연구소에서는 이 유적을 왕성이나 도성으로 보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충분히 고려해서 왕성으로 위용을 갖추었다고 해도 단기간에 특수한 목적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보덕국 안승을 소환한 것이었다. 최고의 왕권을 가진 왕궁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많아, 백제가 멸망했던 시기 전후에 존재한 세력으론 보덕국 말고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일본 학자 세키노 타다시가 왕궁리 5층 석탑을 보덕국과 관련해서 파악하려 했던 점도 참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왕궁리가 전체적으로 발굴되지 않았고 성벽 내부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후 궁장 내부에서 출토된 기와나 토기 등 출토품의 대부분은 백제 멸망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발굴되면서 보덕국과 관련된 학설은 힘을 잃게 되었다.
왕궁과 관련된 천도설
나중에 다시 이야기되겠지만 먼저 신라 경주 발굴조사가 시작된 이후 백제 쪽에서는 1980년 미륵사지 발굴을 시작으로 왕궁리 유적과 제석사지에 대규모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익산에 사비기 왕궁이 있었는지, 무왕의 익산 천도와 왕궁이 관련된 유적을 밝히는데 관심이 집중되었다.
결과는 한국 고대사 문헌에는 나오지 않지만, ‘관세음응험기’에서 기록된 대로 무왕 대 익산으로 천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부류(익산에서 활동하는 학자들), 익산 왕궁을 별도의 행궁, 이궁, 별부로 보는 양성론자들, 그리고 익산 천도를 계획했지만, 실제 실행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로‘익산 경영’이라는 표현을 쓰는 학자들로 나뉘어 있다. 어쨌든 이번 장기적 발굴조사에서 7세기 전반 이곳은 부여에 버금가는 중요한 국가 시설이 있었음이 드러났고 천도설에 대해서는 다음에도 계속 논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