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왕궁리 석탑의 기단부
발굴 당시 왕궁리 석탑의 하층기단은 땅에 묻혀있었는데 1965년 해체 수리하고 보니 발굴한 기단의 형태가 특이했다. 일반적인 석탑은 기단부를 이중으로 튼튼하게 쌓는데 이 탑의 받침돌은 목탑의 기단처럼 네 귀퉁이에 주춧돌을 놓고 위에 8각형의 돌기둥을 높이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장대석을 올려놓았다. 8각형의 기둥과 석재 사이는 막돌과 흙을 다져 채워 놓았다. 흙 속에서는 백제 때 만든 기와의 파편이 다수 섞여 있었다. 공사가 시작되고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1965년 12월 초 왕궁리 5층 석탑 1층 옥개석 중앙에서 사리공 2곳과 기단 내부의 방형 심초석(목탑의 기둥 받침돌)‘품品’ 자형으로 뚫린 사리공 세 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석탑에는 서로 다른 위치에 모두 5개나 되는 사리공이 남아있었다.
 |
| 기단부 아래 심초석과 네 귀퉁이의 8각형 기둥과 사이를 채운 돌들이 보인다. 가운데 심초석 윗면에는 품品자형 사리공이 보인다.(목탑 기단부 양식) |
왕궁리 오층석탑의 의미
이곳은 구릉지대로, 덩그러니 오층탑만 있던 곳을 크게 주목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이곳에 오층석탑이라도 없었다면 주변이 백제 왕궁지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익산 지역 문화유산에 관심이 늘어난 것은 1960년대 무렵부터인데, 그 서막을 올린 것이 왕궁리 5층 석탑의 해체 수리 공사였다. 이 탑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북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붕괴 위험이 있었다. 1965년 11월부터 석탑을 전면적으로 해체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동국대 황수영(1918-2011)교수를 단장으로 하여 공사하던 중 사리장엄구가 대거 발견되면서, 이 탑은 사리장구와 함께 다음 해 국보로 지정되었고, 때마침 ‘관세음응험기’가 일본에서 발견되어 들어오면서(1971년), 제석사지 발굴, 미륵사지 발굴로 이어지면서 익산 천도설까지 비약되는 단초가 되었으며, 익산은 고도(왕도)로 인정이 되면서 백제 말기의 문화를 이끌었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으니 이 탑이 가지는 사학적 의미는 심대하다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왕궁리 오층석탑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백제 역사 속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해 주고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의 가치
왕궁리유적에서 오층석탑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탑의 양식이나 예술성을 떠나 그 안에서 나온 유물의 가치는 백제사 연구에 있어 어느 타 유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학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매듭을 남기고 있어 우리는 항상 이들 유물에게 애정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왕궁리유적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는데 오층석탑에 대해서는 박물관 유물을 소개할 때 더 자세한 이야기로 소개하겠고, 부엌 터, 가마터 등 왕궁리 유적에서 미쳐 못 한 이야기는 여기서는 양해를 구하고 생략하겠습니다.
 |
| 안개 낀 어느 날 아침에 보이는 왕궁리 오층석탑의 모습은 마치 천 년 넘는 역사의 미스터리를 나를 통해 밝혀달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필자에게 다가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