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룡지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마룡지는 무왕의 서동 설화에 나와 있는 무왕이‘경사(수도)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라는 이야기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이다. 익산 시내로 들어가는 대로변에 있는 이 연못은 백제 무왕의 생가터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지금도 익산시에서는 대대적인 유적 정비 및 생가터 복원계획의 하나로 발굴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 사학계의 화두인 익산 천도설을 믿는다는 가설 아래 서동 설화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익산시의 노력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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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문에 의하면 2017~2024년에 걸쳐 8년간 서동생가터 유적정비 공사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2025년에도 공사가 마무리되지 못하고 복원은커녕 파헤쳐진 황토는 아직 덥히지 못하고 있었다. |
서동 설화
마룡지에 있는 안내문에 의하면 백제 무왕의 탄생 설화 배경인 마룡지는 이른 여름부터 홍련이 핀다고 하는데, 연못에 비친 검붉은 홍련은 용이 혓바닥을 내민 것처럼 기세가 등등하고 버드나무 가지는 잠룡이 승천하듯이 바람이 불면 수면 위에서 초록빛으로 출렁인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 무왕 조에는 ‘무왕의 이름은 장이고, 그의 어머니가 과부인데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곳에 살던 용(지룡池龍; 연못의 용)과 인연을 맺어 서동을 낳았다.’라고 전하며, 여기서 연못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마룡지라고 했다. 서동의 어릴 적 이름인 맛동과 용의 연못을 합치면 ‘용이 된 서동의 연못’이라는 뜻의 마룡지가 되기 때문이다. 농경 문화권에서 용은 여의주가 비를 부르기 때문에 왕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용의 아들로 태어나 마룡지 주변을 뛰놀던 서동이 훗날 신라의 선화공주와 혼인한 이후에도 한동안 마룡지에서 살았을 것이다. 서동은 효성이 지극하여 마를 캐어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훗날 마를 캐던 자리에서 다섯 덩이의 금을 얻었고(오금산)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진평왕과 사람들의 인심까지 얻어서, 마침내 백제의 30대 왕이 되어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면서 서동은 스스로 용의 아들임을 증명했다고 한다. 마룡지 일대는 주춧돌과 백제 시대의 기와 조각이 많이 출토되어 서동의 생가터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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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룡지 주변에 버드나무가 늘어져 있고 뒤에 보이는 산이 무왕이 어릴 적 마를 캐고 다섯 덩이의 금을 캤다는 오금산이 보인다. 그곳에는 익산을 지키는 방어시설인 익산토성이 있다. |
마룡지는 인근의 국도변 주유소에서 토목공사를 하다가 초석과 백제 시대 기와 조각이 수습되었는데 왕궁에서 사용되던 것과 같아 발굴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마룡지는 뒷산인 오금산에서 내려와 용샘에 모였다가 마룡지로 흘러든다고 하는데, 북쪽에는 서동이 물을 길어 마셨던 ‘용샘’과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마를 캤다는 ‘오금산’이란 지명도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고, 지금도 이 지역 마을을 용골이라 부르며 용샘을 마을 우물로 쓰고 있다고 하니, 서동 설화 내용의 진실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마룡지가 서동 설화에서 나오는 무왕의 탄생지인지, 아닌지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위치적으로는 익산 왕궁지, 미륵사지, 무 왕릉, 익산토성에 둘러싸인 곳에 있는 연못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