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지 발굴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왕궁리유적의 궁장이나 5층 석탑 주변에만 머물던 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은 2000년에 들어서며 점차 성의 서북쪽 일대의 성벽과 내부 조사로 확대되었다. 2000~2002년 사이 서쪽 성벽 인접 지역을 발굴하다가 공방과 관련된 유물들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때가 필자가 이곳을 막 다니기 시작한 때였다. 이곳에서 금과 유리 생산에 사용한 다량의 도가니 파편과 슬래그(광석을 제련한 후 남은 찌꺼기)가 출토되자, 발굴팀들의 사기가 갑자기 올라가는 분위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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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 중인 왕궁리유적 공방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도가니 |
공방지
왕궁리 유적이 다른 신라나 일본과 이례적으로 다른 점은 왕궁 내부인 북서쪽에 금이나 유리를 생산하는 대규모 공방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왕실에서 공방을 직접 운영하면서, 당시에는 금은 세공이나 유리 제작은 첨단 산업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는 전문 기술자를 직접 채용해서 원천 기술의 유출을 막거나 제품의 생산을 통제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이는 불에 탄 흙, 노벽, 송풍관, 숫돌, 원재료, 정교한 금, 은, 유리 동제품 그리고 수많은 도가니가 발견됨으로써 이를 증명해 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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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의 위쪽에 높은 지역은 왕궁의 후원 지역이고, 아래 낮은 곳에 기둥이 박혀 높여 놓은 지역이 공방지가 있던 자리이다. 뒤에 조그만 집 두 채가 화장실이 발견된 곳을 재현해 놓았고 화장실과 공방지 사이에는 동서로 배수시설이 있어 이곳을 통해 아래 담장 밑으로 외부로 오물을 배출시키는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사진은 2021년 사진으로 후원 아래에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지금은 마무리되어 있다. |
이곳에는 1,400여 년 전 당대 백제 최고의 장인들이 숨 쉬고 있었다.
나중에 발견된 화장실 북쪽에서 공방터가 발견되었는데 화장실은 공방에 근무하고 있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공용 화장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남북으로 긴 2동의 공방 관련 건물이 자리 잡고, 이 좌측에는 공방 관련 원료, 재료, 도구들을 버리는 ‘폐기지’가 있었다. 특히 공방 작업실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독특한 지하 시설도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특히 금, 은, 유리 제품 등 다양한 종류의 공방 관련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조사 결과, 오랜 시간에 걸쳐 대규모 생산시설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궁내의 공방인만큼 관영 공방의 장인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이들만이 왕궁에서 근무했을 것이고 여기서 나오는 제품은 당대 최고의 제품이 생산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생산된 유리 제품은 구리나 철 성분의 영향으로 녹색 빛을 띠는데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리의 녹는 온도를 낮춰주는 납 성분이 함유되어 있었다. 나중에 미륵사지 서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서 녹색 유리 제품이 다량으로 출토되면서 백제인의 녹색 유리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 제작된 유리 제품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여기서 나온 금제품은 80% 이상이 20~24K였다고 할 정도의 높은 제련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공방지 발굴의 의미
공방에서는 소음, 악취, 연기 등이 발생해서 왕이 상주하기에는 나쁜 환경으로 이곳에서 왕이 상주하지는 않았다고 추정하면서, 이런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백제의 영향을 받았던 일본 아스카이케, 아스카무라 유적에서의 생산, 관리, 유통을 보면서 백제를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왕궁리 공방에서 생산된 금속공예품들은 백제 왕실의 경제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많은 학자는 익산 왕궁 설립 목적이 왕궁리 공방에서 나온 귀중품들을 왕실에서 직접 관리하면서 수로를 통해 국제 무역을 활발히 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하는 추론도 제기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