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사찰 터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왕궁에서 사원으로
백제 왕궁은 어느 시점에서 사원으로 바뀐다. 궁장 내 사원 관련 시설들은 백제 사비기 건물지들을 없애고 그 위에 사찰을 세웠는데 백제 멸망기나 통일신라 초기부터 고려 시대까지 존속했다. 사원 관련 건물지들은 자북(나침반의 북극 방향)에서 약 6도 정도 동쪽으로 기울어진 진북방향(변하지 않는 북극성 방향)을 중심축으로 하고 있다. 그 중심축 선상에 5층 석탑과 금당지, 강당지가 놓여있는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1탑 1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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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궁리 오층석탑: 현재 왕궁리유적에 남아있는 사원 관련 자료 중에 확실하게 남아있는 것이 5층 석탑이다. 이 석탑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차지하는 비중이 엄중해 따로 언급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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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당터: 탑의 북쪽에 금당지가 자리하며 정면 5칸(23.3m), 측면 4칸(남북 16.3m)이다. 동쪽과 북쪽에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 장대석이 남아있다. |
부처를 모시는 금당은 사찰의 중심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된 통간 구조(집안의 칸이 막히지 아니하고 서로 통하여 하나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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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당터: 금당지 북쪽에 자리한 강당지는 정면 5칸(동서 17.7m), 측면 4칸(남북 12.6m)이다. |
17.9m 측면 4칸 12.6m으로 된 통간 형식의 건물이다. 근처에서 부정형의 공방 폐기지도 발견되었고, 그 밖의 사찰 유적으로는 오층석탑 동편의 기와 가마터와 강당터 서편의 건물터 두 자리가 있다.
왕궁리 사찰의 의문
왕궁리유적 출토 유물 중 ‘관궁사官宮寺’, ‘대관관사大官官寺’, ‘왕궁사王宮寺’가 쓰여있는 문자기와가 있다. 삼국사기 무열왕 조에는 661년 6월 무열왕이 사망하기 직전에 ‘대관사의 우물의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의 땅에 피가 흘러서 넓이가 다섯 보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무열왕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나오는 글인데, 이는 백제나 신라에게 익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컸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 보면 661년 6월 이전에 대관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660년 7월에 망한 백제 이후에 신라가 1년 만에 백제 영토에 큰 절을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한 가지 의문점은 왕궁리사지는 백제 사원의 1탑 1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지만, 석탑과 금당 사이가 너무 멀거나, 금당지 초석의 형식이나 배치가 기존의 백제 건물지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이런 차이는 왕궁리사지가 백제가 아닌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하지만 문헌 기록을 비롯한 정황 증거들은 통일신라 시대보다는 백제 멸망 이전에 왕궁리 사원이 조영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왕궁리유적이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를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