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오금산성(익산토성)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최근 61년 만에 익산토성이 ‘익산 오금산성’으로 2024년 7월부터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는 정체성 확보를 위해 꾸준히 이의를 제기한 덕분이었다. 오금산성은 해발 125m의 낮은 오금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다. 백제 말기에 지어져서 고려 초까지 사용되었던 성벽으로 지난 2016년부터 지금까지 4차례에 걸친 학술적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토축성이 아닌 석성으로 확인되었다. 최근에는 집수시설과 칠피 갑옷편 등 백제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었는데, 필자가 2025년 4월 때에는 남문지 근처를 발굴 조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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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찾은 오금산성은 골짜기로 되어 있어 석성으로 쌓은 남문지 부근을 집중적으로 발굴조사를 하고 있어, 발굴조사 전인 2021년도 사진을 찾아보았다. |
익산 평야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오금산 구릉 위의 이 성은 위에서 보면 마름모꼴이고 흙과 돌로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690m 정도이다. 오금산에 자리 잡고 있어 ‘오금산성’이라고 불려 오고 있었다. 또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고구려 왕족 안승을 보덕국왕에 임명하고 백제의 유민들을 다스리며 이곳에 살도록 하였다고 하여 ‘보덕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성은 1980년대 2차례의 발굴조사로 성의 규모와 구조가 대략 밝혀졌는데 성벽 단면 조사에서 판축 토루가 조사되었으며 남문이 있는 골짜기 부분 성벽은 석축을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2017년도 정비를 위한 발굴조사에서 서문지와 백제시대 초축한 성벽과 개축 흔적들이 조사되었다. 또 성 내부에서는 생활과 관련된 건물지, 집수정 등이 조사되었고 출토 유물로는 백제시대의 ‘수부首府’명 인장와, 수막새, 각종 토기류를 비롯해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는 유물까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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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망대에 오르면 사진 가운데 마룡지가 보이고 그 너머에 왕궁리 유적과 제석사지가 보이고 오른편으로 무왕릉이 내려다보인다. 산성 북쪽으로는 미륵산이 보여 왕궁평 모두를 볼 수 있는 익산 방어의 최적지임을 알 수 있다. |
서동 설화와 오금산
서동 설화에 ‘서동이 다섯 덩어리의 금을 얻었다.’라는 오금산의 전설과 보덕성의 유래는 백제 말과 통일신라 초에 오금산성이 군사적으로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전설에 의하면 선화공주는 서라벌을 떠나올 때 왕비(어머니)가 준 황금을 보여주며 장터에 팔아 오라고 하자 서동은 마를 캐던 오금산에 흔히 볼 수 있다며 금 다섯 덩어리를 가져오자, 그것을 신라 왕궁으로 보내 진평왕에게 사위로 인정받게 된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산이 오금산인 것이다.
오금산성의 의미
산은 125m로 높지 않으나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그러나 전망대에서 보이는 모습은 한눈에 익산 전경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만큼 전략적으로 방어시설이 있어야 하는 최적지임을 알 수 있다. 오금산성은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포곡식(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벽을 쌓는 방식) 산성으로 쌓았고 발굴조사 결과 성문과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연화문이 그려진 수막새와 수도를 표시하는 수부, 북사가 새겨진 기와와 그릇이 출토되어 2km 남짓 떨어진 왕궁리 유적과의 연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함께 출토된 솥 모양의 토기와 뚜껑 덮은 접시는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이 사는 왕궁과 수도를 방어하는 오금산성의 존재는 국가의 수도로 발전했던 익산의 과거를 잘 보여준다. 또한 오금산성이 왕도를 지키는 방어시설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익산이 왕도로 인정받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