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창 준
서초이엔이치과원장
갤러리무늬와공간 대표
bonebank@hitel.net
우리 나라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불교가 도래하였고, 토속 민속 신앙과 조화되며 이어져 내려와서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기원의 장소도 이와 관련된 곳이 많다. 특히 마애불은 전국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어 우리 민중들의 생활 속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천주교는 조선 중기 이후에 중국을 다녀온 양반 계급에 의해 천주학으로 연구되다가 로마 교황청에 사제 파견을 요구하는 서찰을 보냄으로써 비로소 교리가 확립되며 종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불교나 토속 신앙에 비해 늦게 전래되다 보니 관련된 돌 유적도 흔치 않다.
지난 4월 17일은 크리스천들의 최대의 축제인 부활절이었다. 부활절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남을 찬양하는 날로 서방교회에서는 춘분 당일 혹은 춘분 직후의 만월 다음 첫번째 일요일로 정해 놓았다.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에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묵상하기 위해서 부활절 전 사순 시기의 금요일과 성 금요일에 ‘십자가의 길’이라는 신심기도 행위를 드린다. 이 기도는 이슬람계 국가가 중동을 차지해 예루살렘으로의 성지순례가 어려워지자, 굳이 이스라엘까지 성지순례를 가지 않아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영적 순례를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보통 성당 내부 벽면에 조각이나 그림으로 14처가 그려져 있거나, 옥외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작년 봄 몇몇 회원들과 촬영을 갔던 나바위 성지는 조선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신자와 함께 중국을 떠나 입국할 때 거친 풍파 속에 제주에 잠시 난파되었다가 다시 떠나 첫발을 디딘 육지이다. 이 곳 성당 뒤쪽 언덕 정상에서 소세 신부 묘가 조성된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큰 바위 뒷면에 천주교 성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애삼존불이 있다.
원래 이곳 화산에는 스님이 암자에 기거하고 있었다. 초대 주임인 요셉 베르모렐 신부가 본당을 준비 하던 중 화산에 자리잡고 있는 기존 암자에 사는 스님을 찾아가 성당을 지으려는 뜻을 밝혔다가 문전 박대를 당하고 쫓겨났는데, 두세 달이 지난 어느 날 스님이 바랑을 짊어지고 찾아와 "이제 나는 이 곳을 떠나니 이 화산과 암자는 신부님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뜻밖의 일이라 어떻게 된 일인가 알아보니 베르모델 신부가 찾아간 다음 날부터 스님의 꿈에 매일 한 여인이 나타나서 이 곳은 내 자리이니 비워 달라고 했다는 내용을 듣고 그 자리에 성모동산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정상을 지나자마자 십자가의 길 제 10처가 돌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왜 그런지 이 곳이 내 눈길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사진 참조>.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옷가지를 가져다가 나누어 가졌다(요한복음 19장).
제10처는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긴 곳이다. 매를 맞아 피딱지와 함께 뭉쳐진 옷을 벗길 때에 살이 함께 묻어나니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데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죄도 없이 사형수로 군중 앞에 서시는 모욕을 당한 것인데, 게다가 옷까지 벗겨져 알몸을 군중들에게 보이니 그 수치심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옷 벗겨지심의 사건을 묵상해 보면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벗겨버리는 비참함, 굴욕을 떠올릴 수 있고, 우리의 나약함을 다시금 느끼곤 한다.
저자도 어느새 68년이란 세월을 살아오다 보니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적도 있었고, 남들의 오해, 타인들의 눈초리 속에 수치스러움을 느끼다 보니 죽고만 싶었던 순간들도 있었다. 다행히 그럴 때마다 생각치도 못했던 몇 분들의 위로와 격려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그 시절의 무력감, 모든 고난과 수치와 고통의 순간들은, 이제와 생각해 보면, 어둠 속에서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이 날 돌로 형성된 10처를 보니 소싯적의 기억들과 여러 가지 상념들이 머리 속을 맴돌며 마음이 숙연 해졌는데, 그 뒤로 보이는 초록 잎들과 하늘을 보며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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