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정 강
사람사랑치과 원장
건치(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에 입회한 사연이 특별나다. 2000년대 초인가, 어느 날 새내기 치과의사들에게 개원 안내를 하는 자리를 마련한다기에 과연 소위·의식화(意識化)·를 앞세운 이들이 후배들을 어떻게 인도하는지 궁금했다. 교대 근처에서 저녁 대접까지 하는데 참가비가 없었다. 하여 그냥 자리를 뜰 수 없어 입회비를 냈는데, 이제까지 거액(?)의 연회비를 내는 최고령자로 남아있다.
입회 이후 건치 정책연구회에서 주관하는 모임에는 자주 참석하던 중 2012년 뜻밖에 건치신문 ‘논설위원’으로 위촉받았다. 지난해 4월까지 서른번에 걸친 기고(寄稿)를 했다. 평생 처음 기고한 ‘논설’의 제목은 [‘매출’과 ‘장사꾼’] 이다. 말과 글이 세월 따라 변하기 마련이나 의료 영역에서 ‘물건 따위를 내다 파는 일’이라는 단어 ‘매출’의 무심한 통용을 지적하고 싶었다. 세상 흐름이 온통 돈에 매몰되다 보니 ‘가격’(물건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돈으로 나타낸 것), ‘의료시장’, ‘치과 상권’, ‘치과 상호’, ‘흥행(세미나)’ 등으로 자연스럽게 인용하고 있다.
그때그때 일어나는 치과계의 변화무쌍한 일들을 대상으로 주제를 잡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편집인으로부터 유일하게 퇴짜를 받은 글은 유디 치과의 부당함을 지적한 것이었다. 소송을 우려한 편집실의 권고였다. 초반에 해마다 한두 차례 받은 원고 청탁이 말년엔 서너 차례로 늘었다.
인터넷 신문이 되면서 ‘인기기사’ 1위에서 5위까지를 소개하는데, 비판적인 글보다는 개인사를 포함한 내용의 글이 어쩌다 순위에 오르기에 논설에 어울리지 않은 사사로운 글을 쓰기도 하다가, 지난해 10여 년 만에 슬그머니 그만두었다. 건치신문의 ‘논설위원 위촉’은 글쓰기에 용기를 줬고, 이력서 경력란에 올리기도 했으니 참 감사한 일이었다.
올해 초 우연히 ‘치학신문’기자의 제의로 어떻게 치과대학을 지원했으며, 이후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한 달에 두 차례 A-4 용지 1매 반 정도로 1년간 쓰기로 해 24회 중 이글이 20회차가 된다. 글쓰기가 전보다 편하게 된 것은 휴대전화기 덕분이다. 종이사전이 필요 없고 한자를 쉽게 사용하고, 띄어쓰기나 철자법도 알려주며,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궁금한 자료를 확인한다. 인공지능 AI가 대세인 이즈음 ‘챗지피티’시도는 생각만 하고 있다.
1969년 10월 18일 자 ‘서울齒醫報’ 제5號에 송 아무개 여류 작가의 “닥터 킴의 추억”이라는 글에 “남의 썩은 이나 치료해주고 그 수수료로 자식과 부인을 부양하는 사람으로선 너무 멋졌다”, “죽으면 죽었지 이를 갈진 못하겠어요”, “틀니를 해서 끼우고 불편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다시는 치과에 못 간다” 등 진료 경험담이 있었다.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되어 알게 모르게 높아진 자존감이 치과의사가 되고 처음으로 1970.1.25.자 ‘치의보’에 항의 차원의 글을 투고했다. 글 제목이 “‘닥터 킴의 추억’을 읽고” 였다. 이후 수필에 해당하는 글쓰기가 이어져, ‘월간 세브란스’, 고교와 대학 동창회보, 로타리 클럽잡지, 심평원 월보, 치과신문 등에, 수많은 글이 가능했다. 치의신보에 심평원 경험담인 ‘보험 이야기’를 40회 연재했으며, 얼마 전엔 국군장병에게 배포하는 월간지‘자유’에 구강 건강에 대한 글을 열 차례 쓰기도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20대에 서툴게 시작한 어쭙잖은 글이 망구(望九), 80 나이 넘어까지 이어지니 매우 고마운 일이다. 근래, 글쓰기는 치매 예방으로 하고 있다. 인기기사 순위에 오르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