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정 강
사람사랑치과 원장
1960년 4월 19일, 소공동 교사에서 3학년 수업 중 어디선가 알려온 소식에 모두들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로 시청 쪽으로 향했으나 이미 광화문 네거리까지 밀린 데모대를 만나 다들 흩어져 귀가를 서둘렀다.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한 발포로 총격전이 벌어진 후 뒤늦게 나선 것이었다.
학생들의 힘으로 나라의 틀이 변하면서 학생운동의 하나로 ‘국민계몽대’ 표찰(標札)을 달고 충남 당진 등을 돌며 감히 농민들 앞에서 생활개선 운동 차원의 연설을 한 일은 지금 생각하면 참 쑥스럽다.
예나 지금이나 이과보다 법대나 상과대학을 다닌 절친이 더 많다. 서울대에서 ‘통일 운동’ 모임 준비에 12 단과대학의 구색을 위해 법대 친구가 찾아왔다. 11월 1일 ‘서울대 민족통일연맹’ 발기인 모임엔 정치과, 법대 주동자들 모습을 본 이후 어울릴 자리가 아니란 생각에 처음이자 마지막 참여였다. 이후 ‘민통(민족통일연맹)’은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며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슬로건에 민족주의가 중요한 흐름으로 등장해 세상이 매우 시끄러웠다. 516 군사 정변 이후 관련자들은 15년에 달하는 실형을 받기도 했다.
1961년 4학년, 임상 실습으로 환자 진료에 분주하던 중, 516 다음다음 날인가, 수업을 마치고 귀가한 장충동 집 대문 앞에서 바로 성동경찰서로 끌려갔다. 516 혁명공약의 “첫째, 반공(反共)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에 따른 소위 ‘용공분자(容共分子)’는 검속(檢束) 대상이었다. 발기모임에 단 한 차례 참석했으나 치대에서 유일한 참여로 ‘민통’ 조직표 상위에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정보계 경사는 뺨부터 때리고, 가담 이유를 물어, 순간 ‘이북에 계신 할머니를 만나고 싶어서라고’ 했다. 어린애 같은 계산된 답이 통했는지 취조(取調)는 그게 다였다.
유치장 한 방에 일본 유학을 한 젊은 교수와 혁신계 정치인(윤길중)도 ‘용공’ 관련으로 잡범들과 함께했다. 훗날 국회 부의장까지 지냈고 훌륭한 서예가인 윤길중 어른이 써준 양정강치과 개원 축하 족자(簇子), ‘일원무애(一圓無碍)’는 지금 내 서재(書齋) 벽에 걸려있다. ‘콩밥’이라 불리는 주먹밥을 먹는데, 며칠 후부터는 속에 ‘스팸’이 들어있었다.
유치장 근처 밥집에 ‘특식’을 부탁한 어머님 솜씨다. 그때나 이제나 세상살이를 편하게 보내서인가? 사상적으로 뚜렷한 이념을 품은 바도 없는 처지로 유치장 생활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래도 사업차 일본 출장 도중, 급히 귀국한 부친에겐 심히 죄송했다.
학교 출석번호 43번과 같은 43일 만에 재판도 없이 풀려났다. 당시 대학마다 중앙정보부(안기부, 국정원) 직원이 있었음에도 교수회의에서 출석미달을 눈감아 주어 결석을 많이 한 친구들도 함께 유급을 면했다.
1962년 12월 구강외과 인턴 및 석사과정 중, 뉴욕 구겐하임 치과병원 취업 초청장을 받고 미국엘 가게 됐다고 방방 뛴 기억이 새롭다. 한데 용공 경력이 걸림돌이라 사전에 힘 있는 이의 도움을 마련한 후 여권 발급 창구를 찾았으나 위에서의 전달 이전인지 불가(不可)라고 했다.
재확인 후 찾아간 창구 직원은 전과 기록으로 퇴짜 후 바로 허가는 처음이라는 표정이었는데, 당시 ‘중정’ 김00부장 배려로 1963년 8월 미국행이 가능했다. 1979년 동경도 치과의사회 방문차 신청한 여권이 이미 미국에 5년 머문 이후 임에도 발급 거절로 여행을 포기했다. 다음 해 ‘남산’에 위치한 ‘중정’에서 면담한 후로는 외국 나들이를 할 수 있었다. 2005년엔 갱신한 여권을 공항 출발장에서 아슬하게 전달받으며 남들보다 발급과정이 한 단계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전에 유치장에 여러 날 갇힌 전력(前歷)이 여전히 작용했다. 전과(前科)를 속되게 이르는 말인 ‘빨간줄’이 참 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