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정 강
사람사랑치과 원장
대학원 시작 때까지 두 달여 학비를 마련할 요량(料量)으로 직업안내소를 찾아 얻은 일이 웨이터보조(busboy)였다. “‘경험이 있냐’고 물으면 ‘네’라고 답하라”는 선임자의 안내를 따랐다. 1964년 4월에 시작한 뉴욕 세계박람회장 불란서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웨이터는 봉사료 일부를 일과 후 보조에게 준다. 손님이 적어서인지 한 달 남짓 후 해고(fire)를 당하고는 수녀가 운영하는 양로원에서 음식을 나르고 치우는 일을 했다. 양로원은 봉사료 없이 주급만받지만 일이 단순하고 식사 해결은 후식까지 마음껏 가능했다.
뉴욕 1년 살이 후 큰 트렁크 하나를 끌고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16시간이나 걸려서 시카고에 도착했다. 두 시간마다 바뀌는 노년의 버스운전 기사가 인상적이었다. 트렁크를 보관함에 넣고 난 후 학교기숙사는 비용 부담으로 포기했으니 거처 마련에 나섰다. 학교 근처인 한인교회를 찾았으나 은퇴를 앞둔 목사님 도움은 난망(難望)이라 근처 ‘빈방’ 사인이 붙은 한 호텔에 월 $100 방에서 시카고 첫날을 시작했다. 가난한 독신 노인들이 주로 머무는, 취사가 가능하고 낡아서 이름만 호텔이다.
대학원은 평균 B 학점이 안되면 flunk라니 쿼터에 $420인 등록금이 결정적인 동기부여가 됐는가? 첫 9월 학기 3달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를 참 열심히 했다. 모든 시험은 주관식 문제로 자그마한 공책이 답안지다. 영어가 짧으니 예상문제에 준비한 답을 줄줄이 암기하느라 학교를 오가고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시험 준비만 열심히 했다. 궁금하기만 하던 첫 학기 성적은 임상 진료과목만 A, 나머지는 B였는데 주임교수 왈 “다음부터는 얼마나 많이 아는가를 묻는 것이니 답을 길게 쓰라”고 해서 다음 학기부터는 뻔히 아는 내용도 길게 쓰니 A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과제는 Sicher 교수의 전두골, 측두골, 접형골을 파리핀 왁스로 빚는 것이었다. 첫 학기를 통과하고는 상황파악이 됐는지 공부에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두 번째 쿼터 등록을 마치고 나니 수중에 몇 푼뿐이라 짧은 겨울 방학엔 명색이 서울 석사학위 소유인 치과의사가 시내 회원만 드나드는 음식점에서 ‘버스보이’를 했다. 식사는 스테이크도 가능했다. 담배 심부름은 식당 안에 있는 자판기에 준비한 동전 35전을 넣고 50전 아니면 1$을 받았다. 마침 한인교회 신임 목사가 3층 교회 건물 관리(Janitor) 일을 하겠냐고 물어와 월 100$ 방도 생면 부지 룸메이트와 나누어 쓰던 호텔에서 나왔다. 임무는 1층 예배당 청소와 3층 한국인 독신 남녀가 머무는 방 몇 개 침대보 갈기와 공중화장실 청소였다. 주급 $16에 3층 구석 방 하나로 숙식을 해결했다. 여러모로 힘이 들었는지 한때 60에서 50킬로까지 체중이 줄기도 했다.
환자 진료과목은 대학원생 진료실에서 감독 없는 자율 시행이라 느슨하게 대처하고 수강과목 학점 취득과 역시 논문 마련이 가장 중요했다. 전반부를 마친 여름 쿼터부터 시작인 논문은 주임교수가 권하는 미생물학과 재료학 중 Skinner교수 후임인 Greener교수 지도로 재료학을 선택했다. 논문 주제인 ‘충전물과 치질(齒質) 사이 미세구조 확인’을 공과대학 재료학 교실 Meshii교수 지도로 전자현미경실에서 시작했다. 여러 날 실험을 했으나 전혀 진척이 없어 실험실 출근 대신 학비라도 마련차 치과보험을 시작하는 보험회사에 시간제 심사일을 했다. 하여 행방불명 상황으로 알려져 소아치과 주임교수의 추궁(追窮)을 받았다. 이때 교환교수로 전자현미경실로 출근하던 호주 멜본 대학 치대 보철과 Grant교수의 중재로 논문 주제를 변경하고는 실험이 일사천리로 진행돼, 마지막 학기 논문 과목 학점까지 모두 A를 받았고 훗날 <호주 치과 저널>에 실리기도 했다.
2년 차 11월 어느 날 심리학 담당 여교수 Jenks가 갑자기 강의실을 옮겨 가니 내 결혼 소식이 퍼졌나 축하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당시 시카고에 하나뿐인 한인교회는 동포들 만남의 장을 겸했다. 논문 진행도 순조로우면서 한눈팔다가 한 결혼으로 아이 셋 낳고 59년째 잘 지내고 있다. 정보라 박사께서 주신 축하선물 새하얀 담요가 눈에 선하다. 청소하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은 기차로 ‘밀워키’에서 하루를 보냈다. 1966년 3월 44차 IADR 대회에 석사 논문 발표로 왕복항공권을 교실에서 부담하기에 아내와 진짜 신혼여행은 ‘마이아미’에서 했다. 발표 리허설을 하면서 질문에 답이 어려우면 얼른 교수에게 눈짓을 하기로 했는데 다행이 질문 둘을 잘 넘겼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7할, 재주(노력)가 3할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내겐 ‘운구기일(運九技一)’이 석사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나타났다. 소아치과 6명 입학에 2명만 과정을 마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