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정 강
사람사랑치과 원장
연세대 교수 임명장을 받고 미국 생활 5년 만에 나선 귀국길은 소위 금의환향은 몰라도, 돌이 겨우 지난 딸아이와 얼마 후 곧 태어날 둘째를 품은 아내와 좀 힘들기는 했어도 희망 가득했던 기억이 새롭다.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 호놀룰루, 동경을 거쳐 김포로 돌아왔다. 라스베이거스 공항에서 한번 타보고 싶던 포드 ‘무스탕’을 빌려 국립공원을 돌아보다 연료 부족으로 한적한 곳에서 멈추는 바람에 지나가던 트럭의 도움을 받은 일, 공항에서 받은 카지노 광고용 동전($5불?)이 생각난다. 언덕 많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하필 ‘폭스바겐’을 빌렸고, ZOLLER 병원 중국계 인턴 Dr. Sheck을 만나기도 했다. 호놀룰루에서는 ‘코로나’ 자동차로 섬 일주를 했다. 동경에서는 영어로 택시기사와 소통이 어려웠기에 동경의과치과대 교정과에 머물던 서정훈 선배 도움으로 아버님 선물용인 낚싯대와 슬라이드 제작용 카메라와 지지대를 마련했다. 귀국 이삿짐엔 냉장고, 에어컨, 재산 목록 1호 오디오시스템, 아기침대, 골프채 하프 세트, 빔 프로젝터, 록키마운틴 용접기가 들어 있었다.
1968년 10월 1일 자로 출근한 세브란스병원 치과에는 지헌택 과장, 구강외과 윤중호, 보철과 김정수, 교정과 김찬숙 교수와 수련의로 전영남, 이배진, 이완철, 김세동, 차혜영, 김남일, 이주민 후배가 있었다. 출근 초 지헌택 주임교수 호칭을 “닥터 지”라고 했다가 김찬숙 선배가 “과장님 이라고 해야지”라며 놀란 일은 미국물 5년에 눈치 없이 건방졌던 한 대목이다. 하긴 미국 대학에서 학장에게 이름을 부르는 학생들을 봤고, 알바 하던 회사에서도 머리 허연 사장에게 이름을 불렀다.
석사학위가 둘이라도 1969년 3월 박사과정에 입학 1972년 2월 치과의사 연세대 정규과정 의학박사 1호가 됐다. 당시엔 소위 ‘연구생 과정’으로 석사학위 없이 박사과정 지원이 가능했는데, 1969년 석사과정을 마치고 바로 지원한 의사와 치과의사는 합격, 연구생 지원자인 개원 의사 여러 명은 모두 낙방했다. 사연은 시험 며칠 전 약사시험 출제가 사회문제로 비화, 의학독일어 특강 내에서 출제하던 관행이 갑작스레 모두 생소(生疏)한 문제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1969년 3월 치과대 초대학장으로 박용덕 교수가 취임하고 치의예과생이 치과대학으로 진급하며 필자는 의과대학에서 치과대학 소속이 됐다. 1970년 이원용이 소아치과 제1회 인턴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환자 진료가 주업무였다. 이후 이영송(1972), 신영순, 허노정(1973), 강순영, 손흥규(1974), 성광숙(1976) 수련의 중 석사학위과정을 밟은 이원용과 허노정을 지도했다.
1971년 3월 드디어 2학년 1학기를 맞이 한 1회 입학생 18명에게 소아치과 강의를 시작했다.
1972년 조교수, 1975년 12월 부교수, 1976년 2월 말로 전임 교수를 마칠 때까지의 기억 몇 토막을 돌아본다.
1971년 김귀선 학장 취임 후 학장실 벽엔 과별 수입을 막대기로 표시, 소아치과도 참으로 열심히 진료에 임했다. 그래야 봉급도 챙기고 1971년 착공 1973년에 준공한 치대 단독 건물 건축비 갚기에 일조할 수 있었다. 1973년 소아치과 교수 증원으로 소진문이 조교수로 발령이 났으나 ‘유신 사태’를 빌미로 일리노이대에 머물고 귀국하지 않았다. 즐거운 추억으로 1973년 1회 생 졸업 기념 제주도 수학여행에 손흥규 4학년 총대 외 15명과 기차, 항공기, 여객선 모두를 경험하며 인솔 교수로 아내도 함께했다. 1974년 김귀선 학장 추천으로 치협(김동순 회장) 국제 이사로 선임됐고, 1975년 차문호, 김진태 교수 다음으로 소아치과 학회장이 됐다.
짧은 전임 교수의 아쉬움을 그런대로 달래 주는 사연으로는 매해 스승의 날이면 2회 졸업생 계영청이 보낸 카드를 받았고 여식 결혼 주례까지 한 일이다. 하나 더, 강의 중에 한 기억이 없는 ‘Be a Gentleman’이란 말을 평생 기억하고 있는 훗날 학장이 된 3회 졸업생이 있다.
개원의로 나서면서 1976년 3월 1일 자로 소아치과학 교실 외래부교수 발령을 받고 이후 20 여 년동안 소아치과 한 챕터를 강의했다. 국민건강심사평가원 경험으로 국민건강법 강의도 여러 해 했다. 평생 하려던 교수의 아쉬움을 달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