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정 강
사람사랑치과 원장
평생 교수를 하려더니 어쩌다 7년여 만에 전임 교수를 그만두고 개원의로 나섰나?
1971년 김귀선 연세치대학장이 취임 후 학장 승용차로 몇몇 교수의 출근을 지원했다. 얼마간 잘 이용하고 있었는데 그쪽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지 갑자기 지원을 못하겠다 하여 아쉬웠는데, 마침 이민 가는 처남의 10년은 족히 된 고물 일제 `코로나`를 거금(?) 30만에 양도해 자가용족(自家用族)이 됐다.
차를 몰기 시작한지 몇 달 지나지 않은 1973년 10월, 소위 석유(유류)파동으로 2~3개월 만에 휘발유 가격이 무려 4배가 폭등했으며, 이후 주요 선진국들은 두 자릿수 물가상승과 마이너스 성장이 겹치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하여 아이 셋을 키우면서 교수 봉급으로 계속 차를 굴려야 할지? 운전 몇 달 만에 차를 처분하기도 그렇고. 오기(傲氣)로 시작한 자가운전으로 난감한 처지가 됐다.
당시는 교수들이 퇴근 후 소위 moonlighting(야간의 부업)을 해도 묵인하던 시절이라, 동기생 치과를 찾았으나 모두에게 퇴짜를 맞았는데, 치과의사 볼링팀을 함께하던 선배가 흔쾌히 허락했다. 간호조무사 봉급만 감당하고 당신이 6시 퇴근 후엔 마음대로 진료하라 했다. 전임교수로 퇴근 후 2~4시간 진료는 심신으로 많이 부담되는 일이었으나 수입은 교수 봉급보다 많았다.
1975년 어느 날, 정부에서 다음 해 신학기부터는 의치대 음대 미대 등 전임교수들이 퇴근 후 학교 밖에서 일 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하여 야간 진료를 포기하고 교수직을 계속할 것인가 고민했다.
한껏 올라간 생활비 수준을 떠올리니, 고민이 개원 쪽으로 기울면서, 교수는 그 사명이 학생 교육, 연구, 지역사회 봉사라는 데 하나같이 부실하다는 핑계를 찾게됐다.
즉 강의는 한 학기 주 1회일뿐 나머지는 오로지 환자 진료에 학장실에 과별 수입 막대기 표가 있었고, 연구는 당시 기초학 교수가 한명도 없는 상황에 임상교수 10여 명은 외국 학회 참석이나 연수 기회 없이 연구다운 연구도 없으며, 수련의 지도 차원에서는 진료 경험이 많은 것 외에는 같은 저널을 함께 보며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의사는 첫째가 임상 진료라는 말을 들으면서 혹여 개원을 한다면 시내 한복판 시청 앞에 치과 건물에서 할 것이라 말한 일도 떠올렸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북베트남이 무력 통일을 이루던 시절 김귀선 학장의 갑작스러운 사임에 김용관 서울치대 교수가 3대 학장으로 내정됐다는 이야기가 들렷다. 하여 새로 부임하는 학장께 사의를 표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김효규 의료원장께 진행 중인 학기까지 마치고 그만두겠다고 했다.
치과의사로 교수가 첫째 선택이면서도 개원하면 서울 한복판에서 할 것이라던 생각과 달리 연희동 소아과의원 3층에 자리를 잡고 양정강치과의원을 차렸다. 요즘 치과 의원 이름은 참으로 다양하나, 예전엔 `김치과`, `이치과` 처럼 성씨만 앞에 붙이거나 당당하게(?) 자기 이름으로 많이 했다.
소위 스펙(spec), 조건이 좋아서인지 시작부터 환자가 몰렸다. 그때만 해도 전문영역에 대한 인식이 덜해, 점차 성인 진료가 늘면서 돌팔이 GP(general practitioner)가 됐다. 셋집 주인인 여의사 원장이 치과보다 몇 달 늦게 개원 후 진료 수입이 엄청나서인지 치과 공간을 살림으로 한다며 바로 옆 모퉁이 빈터가 있으니 그만 나가달라고 했다. 수중에 2평 값뿐인데 바로 다음 날 61평 땅을 계약했다. 나가라는 내용증명까지 받고는, 아파트를 처분해 개원 3년여 만인 1979년 1월 신축 치과 건물로 이전 했다. 자그마한 3층 건물은 소아과 원장 덕택(?)으로 마련한 셈이다. 2000년 6월 환갑나이에 폐업 신고를 하니 개원 만 25년 되는 날이었다.
교수하다 개원한 선배가 하루 수입이 한 달 봉급인 날도 제법 있다고 할 때, 난 돈보다 교수가 더 보람 있는 일이라고 속으로 돼내기도 했었는데, 소아치과교실에서 차려준 환송 모임에서는 눈가에 물기가 서린 기억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