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님 반대로 피난 못떠나 어린나이에 가족 지키려 분주
김 영 수
서울대명예교수
6.25 전야
갑자기 바뀐 남한 환경에 적응하느라 학교에 가도 재미를 모르고 어렵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일요일 아침 유난히 날씨가 맑고 쾌청한 그 날 동네 아이들이 모이는 놀이터는 조용했다.
일요일 이어서 그랬을까. 그다음 날은 정체불명의 비행기 2대가 서울 상공을 휘젓고 날아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인민군 비행기라고 했다. 온종일 라디오를 듣고 사시는 조부님도 아무 말도 안하셨다.
다음날 저녁부터는 전쟁이 일어났음을 가족 모두 인지하고 온 가족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서울 고모는 별도로 피난 가는 차편이 있어 이미 서울을 떠났고 10대의 고모들은 큰 배낭을 두 개 준비해놓고 조부님께 어서 피난을 떠나자고 조르고 있었다. 밖에는 억수 같은 밤비가 내리고 있었고 창밖은 어두운데도 짐을 지고 피난 가려는 사람들로 집앞 골목길은 시장바닥처럼 꽉 메워져 있었다. 우리집 앞 약수동 약수고개 샛길을 넘으면 바로 금호 옥수동이고 한강이다. 다소 가파른 약수 고개를 올라가면 약수터가 있어 나도 가보았던 곳이다.
사람들은 일단 한강을 건너 북한 인민군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월남민 이어서 인민군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며 고모들은 피난 갈 것을 독촉했지만, 물건들은 다 어찌하느냐며 체력으로도 식구들을 감당할 수 없어 조부님은 계속 거부하셨다. 귀중품은 마루를 뜯어 감추면 된다는 의견도 있어 내가 마루 한 장 뜯어보니 깊이가 겨우 30센티 밖엔 안돼 공간이 여의치 않았다. 아무리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가정집에서 상당한 공간을 찾긴 쉽지 않았다.
조부님은 “나는 죽어도 내 집에서 죽지 길거리에서 죽고 싶지 않다”라고 하셔서 결국 피난은 포기하게 되었다. 조금 있다가 밤이 깊어 오자 인민군의 곡사 포탄이 굉음과 함께 집주변에 쏟아지면서 동네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우리 집에도 파편이 할퀸 자국이 여러곳이었다. 우리는 무서워서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를 피하려 했다. 이튿날 아침 궁금해서 집 밖을 나가보니 피난민들은 모두 사라지고 군데군데 핏자국만 조금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인지 유난히 이날 밤은 비가 많이 왔다. 사람들이 흘린 피를 씻어 내려는 것이었을까. 아! 그런데 날이 밝자 그때 부상을 입은 국군복장을 흐트러지게 입은 군인 3명이 서로 부축하고 우리집 앞을 걸어 약수 고개를 향하고 있었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지만, 쳐다만 볼수밖엔 없었다. 그때부터 가끔 지금까지 그 장면은 가슴 아픈 장면으로 남아있다. 그때 그 국군 부상병들은 무사히 한강을 건너 탈출할 수 있었을까? 아직 살아 있을까? 그때를 생각하면 왜 그런지 가끔 시인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교과서에 실려있던 시가 떠오른다. 혹시나 그런 장면으로 사태가 연속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동네 파출소가 있던 자리에 서 있던 인민군 병사에게 왜 피난민들에게 포를 쏘았냐고 물어봤더니 국군 패잔병들이 그쪽으로 도망가서 그들을 겨냥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침 10시쯤 되었을까 주변에 포성도 사라져 고요해져 이웃집 사람들은 형편이 어떨까 해서 부엌쪽 뒷집을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더니 그 집 누구인가가 나를 향해 소리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안면이 없는 사람인데도 “지금 서울엔 인민군이 들어와 있는데 큰길에 나가 환영하지 않고 왜 집 안에 있느냐”고 꾸짖는 것이었다. 어른들에게 전하니 아무 말 하지 않으셨다.
어떤때에 우리 주변에 간첩이 많다는 말이 있지만 이렇게 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남한은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만 모여 사는데 인 줄로만 알았는데 참으로 놀라웠다. 나는 호기심에 한남동 약수동 신당동으로 이어지는 큰길가로 구경하러 나갔다가 또한번 놀랐다.
오늘은 1950년 6월28일, 날이 밝고 국군 병사가 지나간 지 한 시간도 안됐는데 큰 트럭에 붉은 완장을 찬 청년들이 인공기를 휘두르며 붉은 노래를 부르며 비포장도로 위를 먼지를 날리면서 여러대의 차량이 내 달리고 있었다. 길거리엔 환영인파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서울 성동구의 한 변두리 지역만을 볼 수 있어 전체적 상황을 묘사할 수는 없다.
이제는 인민공화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몇일후 어느날 가슴 철렁이게 사복차림의 요원 세명이 집에와서 조부님을 상대로 무슨 조사를 해갔다. 그리고는 한집에서 한 사람씩 인력을 차출하라는 것이었다. 나이가 어린 것이 이런 경우 최대의 장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가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http://www.chihak.co.kr/news/19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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