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오리라 눈물로 다짐 후 떠난 미국유학길
김 영 수
서울대 명예교수
합격통보를 받고 교육부에 상의하니까 현직 전임강사니까 문교부 유학시험은 면제시켜주지만 단 휴직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월급도 지급 중단되고 경력도 단절되고 가족의 생활도 문제가 돼 손해가 너무 컸지만 이미 미국병에 심하게 걸려 있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미래를 위해 미국은 가야겠다고 뼈아픈 결심을 굳혔다. 아무도 학비를 지원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가족의 인내심만 믿고 서글픈 결정을 했다.
그 다음은 유학비용을 마련해야 한다. 내가 가진 것은 치과의원시설, 및 그간 아껴서 벌어 모은 돈, 건물 전세 대금 그것뿐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정보라 선생이 시카고에서 고학하던 이야기 등을 듣고 비상수단도 마련하고 있는데 미국대학에서 은행 잔액증명서와 재정보증인을 서류로 보내라는 편지를 받았다. 난 은행에 저축한 돈은 단돈 1원도 없었다.
그래서 그 무렵 소공동 서울은행 소공동지점에 근무하던 일고 동창 심제식을 찾아가 부탁했더니 간단히 상당한 저금이 있는 것으로 서류를 만들어 주었다. 재정보증인은 미국에 사시는 고모에게 부탁해 해결했다. 간신히 유학문제 절차는 해결했지만 그래도 긴 2년간의 학비와 체재비는 큰 숙제로 남아있었다.
당시는 외환 관리가 엄격했었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가지고 나갈 수는 없었다. 한학기 등록금 674$는 이미 보냈으므로 나는 허리춤에 비상금 200$를 꽂아 넣고 비행기에 트랩을 올라갔다. 일단 미국에 입국할 수 있는 조건은 갖추었으므로 일단 가고 보자는 생각뿐이었다.
환송 나온 내 가족과 대학의 교수님들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에 올라 창밖을 내다보니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멀리 환송대에서 손을 흔드는 분들을 쳐다보면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다짐 또 다짐했다. 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옆에 앉아 있던 미국인 부인 승객이 나를 위로하듯 무슨 말을 했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루한 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레스를 거쳐서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에 도착하니까 오하이오주립대학에 유학하는 한국 유학생들이 공항으로 마중 나와 내가 거처할 기숙사로 데려다 주었다. 이들이 그 후에도 많은 배려를 해주어 정말 고마웠다. 한국에서 유학생이 오면 국제학생과에서 연락이 오고 한국 유학생회에서 교대로 마중 나온다고 했다.
나는 대학기숙사는 비싸서 등록은 하지 않고 왔는데 마침 한국 유학생회장 김동기군의 배려로 International student house의 그가 사용중인 방 2층 침대에 일단 체류하게 됐다.
이곳은 한달 50불로 외국 유학생 중 1개국 1명만 숙박할 수 있게 하는 특별한 기숙사였다. 주말에는 호스트 family의 초청도 있고 여러 자선단체에서 식품을 쌓아 놓고 가도 파티도 열리는 재미있는 곳이다 이곳에 같이 지낸 친구들과는 각별한 관계가 이뤄졌다.
체력적으로는 다소 무리였지만 모르는 것을 배우는 기쁨으로 견디어 냈다. 그래서 대학원 규정학점의 2배를 체험하고 1일, 2일, 길게는 6개월의 장기 post education 코스를 모두 이수했다. 이런 과정은 상당히 비싼 비용이 들지만, 대학원생에게는 무료로 제공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중에 가장 값진 것은 매 주말 토,일요일 6개월간 계속된 리처드 허프먼교수의 Gnathological occlusion 코스였다.
이과정은 당시에 치과 교합학에 대한 이론중 요즈음의 BTS만큼이나 관심과 인기가 높았던 치료술식이었다. “내가 배워갈 것은 바로 이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논문의 주제도 이 분야로 정하고 그분의 지도로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학문이 미국에선 활용되고 있는데 왜 한국에는 전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1950년대에도 한미재단, 국무성 등의 후원으로 미국을 다녀오신 분들은 있었지만 내가 본 미국의 실상을 전해준 교수는 없었다.
전공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내가 본 미국이 아니고 10년전의 미국이었으니까 차이는 당연하겠지만 후진국의 교수가 선진국 정부의 정치적 배려로 대접받으며 시찰하듯 가는 유학은 악착스러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본 글의 내용은 치학신문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