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진료로 유학비용 갚을 즈음인 1979년 첫 임플란트 시술
김 영 수
서울대 명예교수
처음 대학에서 전강이 되었을 때 내 과목 담당교수가 4명이나 되 실습시간 강의는 있었으나 나는 정규 강의실 강의시간이 없었다. 마침 고려대에서 기공학과 강의를 요청해 일주일에 한번 출강하면서 쉽게 강의 노트를 정리해 갔다. 기공학과 학생들이 배워야하는 내용과 치과의사가 배워야하는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미국에선 치과기공사는 치과의사의 손이라고 불렸다. 머리가 아닌 손으로 하는 일 만을 정리한 원고를 1974년 4월에 총의치 보철 기공학이란 책을 처음으로 저서라고 출판했다. 명성 출판사라는 데에서 사장이 찾아와 출판을 돕겠다고 해서 동의했고 만들어 주는게 고마워 아무 요구도 안했지만 사례금 한푼 줄 생각도 안했다.
나는 책을 만들어 주는게 고마울 뿐 이었다. 이어서 개정판 인쇄가 매년 계속되어 나중에는 고급양장으로 출판하고는 10년쯤 잘 이어가다가 원고 개정을 안 하니까 사라진 것으로 안다. 기공학과 강의는 2년 정도 했으나 처음에는 고대에 그냥 나갔지만 대학본부의 출강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강의 연습과 자가 훈련으로 생각했으나 허가신청을 했더니 전문대학 강의는 불허한다고 해서 그만두었다.
그러던 중 1975년 까지는 관례상 모든 교수는 야간개업과 교직을 병행하던 시기여서 교수들은 병원에서 환자진료는 하지만 4시가 지나면 다들 자기 개인 클리닉으로가 돈 버는 것이 평상이었다. Ohio란 말은 인디안 말로 columbus시를 흐르는 fine river라는 뜻으로 미국의 추억이 서린 곳 이어서 나와 내처는 장충동고개에 오하이오란 이름의 작은 구멍가게 치과를 열고 야간진료를 개업하면서 빚진 유학비용을 갚고 있었는데 당시 공무원의 이중국적, 문제교수, 야간개업등에 대하여 정부가 택일을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로 인해 우리과에서도 몇 교수가 사임하여 총의치학 교수에는 나만 혼자 남게 되었다. 2,3,4학년 강의, 실습을 도맡아 하게 되어 갑자기 빠쁜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경희대학에서도 강의를 요청해와 전 강의를 토요일오후는 경희대학에서 보내곤 했다. 한 학기에 5만원 강사료를 받았는데 세금이 3만원이 나왔다. 어이가 없어 세무서에 문의 했더니 재료값이 안들어가니 그렇다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 3시 강의하고 나서 집에 가서는 앓아 누워야 했다. 그래서 한 학기 강의후 그만 두자 우리 과에 있다가 경희대로 간 김인철 학장과는 사이가 틀어져 갔다.
중요한 것은 피로가 겹쳐 교과서 집필은 거리가 멀어져 갔다. 글이라면 간단한 학술잡지원고나 기술하는 정도였다.
특수진료 술식에의 관심
또 하나의 큰 원인은 대학에 있는 한 뜻있는 일을 해야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반진료만 하면 치과의사일 뿐이지 교수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해 특수 진료 술식을 추구해 이를 심어 보철을 하는 Implantology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엇이든 새 기술은 개원가가 먼저 하는 경향이 있어 대학에서 먼저 앞서 가야 하는데, 나는 불만이 있었다. 당시는 미국 개원의 Linkow가 blade implant를 성공시켜 보급하던 시기였다. 이것을 해야 하느냐 안해야 하느냐로 치과의사들간에 의견이 복잡했던 시기였다. 나는 처음으로 외국학술지를 보고 가슴을 졸이면서 한 선배의 도움으로 1979년 처음으로 시술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