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DR 사무총장 초청 한국 알린 후 IADR 개최 가능성 남겨
김 영 수
서울대 명예교수
미국 뉴욕에서 치과대학 교수 27명이 모여 시작한 치과의학을 중심으로 하는 이 학회는 주로 기초치의학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였는데 최근에는 모든 임상과목을 총망라하는 회원 10,000명에 달하는 대학회로 성장했다. 미국 워싱톤에 본부가 있고 지부도 있고 기타국가에는 지부 또는 분회가 있다.
고대 로마의 법을 따라 부자는 여러 가지 많은 권한은 갖는 것과 같이 회원수에 따라 30명 이하가 되는 국가는 분회(section)라고 부르며 council meeting에서 투표권이 없으며 회원수가 50명 이상이 되면 지부(division)로 승격하게 되며 권리와 의무가 증가된다. 한국은 1920년에 창립된 후에 현재 지부로 승인되어있고 전회원이 참여하여 의사를 결정하는 이사의 수는 증가한다. 이사회와 총회는 미국이 2번 개최하고 세번째는 대륙을 달리하는 국가들이 경쟁하여 개최한다.
이런 학회가 우리 나라에서 한번 개최된다는 것은 거의 꿈에 가까운 일이었다. 우라나라에서 한 이란 꿈을 가지고 개최 신청을 한 일은 있었으나 싱가폴과의 경쟁에서 진 일이 있다. 내가 본부 이사가 되었을때 이학회의 모든 업무를 주관하는 사무총장 Clarkson을 한국에 초청해와 여러 치과계신문에 인터뷰와 연회를 통해 한국을 알려주고 우리의 열망을 알리는 일을 했다. 이때가 1993년 인가 였으니까 계산하면 우리나라는 2013~ 2016년 대회 후에나 개최 가성을 확인했다. 못된 후배들은 우리는 다 정년퇴임 한 후가 돼 소용없다고 했지만 미래를 위한 한국을 이루는데 성과를 이루었다. 올림픽처럼 IADR 개최 가능성의 언약을 남기게 되었다.
내가 국제학회에 많이 다니다 보니까. IADR은 WHO와 FDI를 비롯한 세계각국 주요단체와 연계를 가지고 있고 매년 3000연제의 신선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어 장기 발전계획에 의한 폭발적인 발전상을 모든 학회원들이 배워야할것이 너무 많아 참가하는 즐거움속에서 조용한 흥분을 자아내게하는 것이 IADR의 현장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국제학회에 많이 다니다 보니까 회장이 되었고. Seattle 총회에서는 개회식 단상에서 훈장처럼 ribbon을 여러개 달고 한국회장 및 본부이사로 호명되는 순간 기분은 최고 였다.
씨애틀 학회에는 역사상 최고인 50명의 학자가 참가하여 10여편의 논문이 발표 하였고 우리가 주관하고 LG가 후원한 한국의 밤 행사에 IADR 수뇌부와 주요인사가 초청된 가운데 한국 치의학의 위상을 드높혔던 것은 잊을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었음을 말하고 싶다.
보통 IADR council meeting은 2일 동안 개최된다. IADR에서는 회장은 선출하지 않고 전세계회원들이 우편으로 부회장을 먼저 선출한다. 이때 보통 반응은 25%정도가 된다. 어느해 고재승 KADR 학장이 나를 본부회 부회장으로 추천했으나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선거는 너무나 광범위했고 돈과 시간이 많이 들어 사양한 일이 있다. 다 득표자가 본부 부회장이되면 회장 차기회장등은 자동으로 회장으로 승계가 이어진다.
이사회에서는 예산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다루어지고, 회원확충문제, 19개가 넘는 각종위원 회의 보고가 이어진다.
무엇보다 연구자들에게 주어지는 상이 크다. 10여개의 상에 대한 선정자들이 발표된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가끔 들어간다. 미국을 비롯한 지부회에 대한 보고가 있고 이어서 학문 분야별로 구분된 group 보고가 있다. 내가 경험했던 Implantology research gooup을 포함한 20개의 group은 지난일과 예정된 일을 보고 한다. 차기대회 장소를 토의하고 제일 끝에는 추모자명담이 실려져 있는 것으로 보고 된다.
그런데 여기에 특기할 일은 부회장선거 우편 투표를 자세히 검토해보니까 미국 27%, 유럽 40%, 일본 16%, 한국 8%로 개선되기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었다.
대학의 인사에 대하여서도 약술했으나 학회의 임원인사에서도 예외가 없어 임창윤교수 다음에 내가 회장을 하기로 정해졌었으나 이○○씨가 단대에 학장으로 갈 것이어서 필요하다고 이○○씨가 양보하라해서 또 기회를 빼앗겨 늦어졌는데 정○○이는 15회 졸업생만 한다고 비난하고 다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