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김 지도 후 첫무대 인기절정 미8군 오디션 합격
유 차 영
한국아랑가연구원장
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
경기대학교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책임교수
대중가요 유행가스토리텔러
<지난호에 이어>
화양홍업은 국내 최초의 기획사로 미8군 무대에 가수·연주자·무용수·사회자 등을 공급하고 있었으며, 베니김은 기획자였다. 서울대 치대 출신 베니김은 피아노와 트럼펫 연주자로서 직접 가수를 선발했다. 베니김의 아내 이해연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부른 가수로 미8군 무대에서도 인기 정상을 누리고 있었다. 1956년 흑백TV 방송이 시작(12월 1일)되기 전, 국내에서 연예인이 설 자리는 미8군 무대가 유일했다. 마지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이 들어서자 베니킴은 피아노 앞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김혜자라고 했지? 그래 무슨 노래를 부를 줄 아니?" 표징은 엄숙하고 진지했으나 말투는 부드러웠다. 김혜자는 <You don't know me>와 <Memories are made of this> 두 곡을 잇달아 불렀다. "굉장히 소질이 있군." 베니김의 혼잣말이 잔뜩 긴장한 채 노래를 부른 김혜자의 떨리는 가슴을 얼마간 진정시켜주었다. "가수가 되고 싶니?" “예” 김혜자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내일부터 우리 집에 와서 레슨을 받아라." 베니김은 철저하게 미8군 무대를 겨냥해 노래와 안무를 지도했다. 이때 주로 연습한 노래 는 프랭크 시나트라, 도리스 데이, 패티 페이지 등 미국의 정상급 가수들이 부른 히트 곡이었다. 그러면서 베니쇼가 펼쳐지는 미8군 무대로 데려가 선배 가수들의 쇼를 보여주었다. 역시 철저하게 기획된 견습이었다. 김혜자는 독학으로 영어 공부도 일심히 했다. 눈코 뜰 새 없는 사이 한 달이 지났다. 연습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김혜자에게 베니김이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네 월급이야. 한 달이 지났잖아." 레슨비를 걱정하고 있던 김혜자에게 오히려 월급을 주었다. 연습 과정도 일로 치는 서양식 합리성이었다. 집에 와 펼쳐보니 3만 환이 들이 있었다.
당시 서울의 대학교 1년 등록금이 6만 환쯤 하던 시절이었다. 연습생으로 정확하게 3개월이 지나자 베니김은 김해자를 무대에 세웠다. 아내 이해연과 듀엣으로 패티 페이지의 팝송 두 곡을 부르게 한 것이다. 그만큼 김혜자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고, 베니김의 조련에 빨리 적응했다. 김혜자는 이해연과 똑같이 까만색 미니스커트에 역시 까만색 민소매 재킷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객석에서 난리가 났다. 20대의 혈기 발랄한 미군들, 사석에서는 장성 앞에서도 테이블 위에 다리를 걸친 채 편하게 대하는 자유분방한 청년들이었다. 신장 168cm에 콜라병 몸매인 21세의 김혜자, 그녀의 인기는 무대에 서는 첫 순간 이미 하늘을 찔렀다.
이때 김혜자는 처음으로 린다김이라는 예명으로 소개됐다. 3개월 뒤인 1959년 초, 린다김은 단독으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당시 미8군은 3개월마다 오디션을 거쳐 쇼단을 재선정했다. 심사는 엄격해서 A·B·C 등급을 받아야 합격이고 D등급을 받으면 탈락이었다. 등급에 따라 개런티에 차이가 났다. 오디션에 합격해 재계약을 맺으면 그때부터는 레퍼토리는 물론 안무와 의상까지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했다. 그 오디션에서 한다김은 <틸(Till)>(사랑의 맹세)과 <파드레(Padre)>를 불러 특A를 받았다.
오디션을 마치고 청파동 베니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선생님, 저 이름 패티 김으로 바꿀래요." 린다김이 조심스럽게 운을 뗏다. 린다김은 베니김이 지어주었기 때문에 예명을 바꾸는 것은 자칫 스승을 거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터였다. 패티란 예명은 김혜자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 가수 패티 페이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패티김, 그거 참 좋은 이름이구나. 오늘부터 패티김으로 부르자.” 이때 부른 <틸>과 <파드레> 곡이 바로 박춘석이 패티에게 최초로 프로포즈를 한 노래라는 게 가요계의 뒷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