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 목적 만들진 않았지만 저항가요의 대명사가 돼
유 차 영
한국아랑가연구원장
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
경기대학교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책임교수
대중가요 유행가스토리텔러
대중가요를 부르거나 듣는 대중은 노래를 짓거나 부르는 가수들의 의도대로 감응하지 않는다. 귓전을 울리거나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감흥에 스스로의 방식대로 반응 하고 다른 이들과의 공감공명(共感共鳴)의 연결고리를 이루는데, 이것이 인기 온도지수다. 이것이 생방송 같은 인생살이를 서사하고 시대 서정을 읽어가는 유행가의 묘미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대중의 반응, 그 대표곡이 <아침이슬>이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 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가사 전문)
이 노래는 1970년 서울대 미대생 김민기 앨범으로 제작됐으나,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고, 이듬해 서강대 1학년 양희은이 불러 세상을 요동치게 하는 불씨가 됐다. 양회은은 김민기와 서울 재동초등학교 1년 선후배 사이다. <아침이슬>을 작요(作謠)할 당시 김민기는 저항과 선동을 목적으로 한 목적가요로 만들지 않았단다. 하지만 대중에게 불리면서 저항가요의 대명사가 됐으며, 김민기의 이름에 베인 색깔 스펙트럼의 영향으로 더욱더 어둠에서 빛을 지향하는 노래가 된 듯하다. 이 노래는 1975년 금지곡이 됐다가 1987년 6·29선언 이후 해금된다.
역설적으로 이 노래는 1975년 정부로부터 건전가요로 지정되기도 했으나, 대중에게는 저항과 선동의 감성으로 공감됐다. 이 노래는 김민기가 악보를 4등분으로 찢어 버린것을 양희은이 다시 주위 맞춰서 부른 곡이다. 1953년 무교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가 1969년 서린동으로 옮겨 폐한, 음악 감상실 세시봉의 후예 '청개구리집'에서 벌어진 일화란다. 그때 김민기는 20세 양희은은 19세였다.
김민기는 6·25전쟁 중이던 1951년 이리(익산)에서 의사 아버지와 산부인과 조산원을 운영하던 어머니 사이의 10남매 중 막내,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낙동강 전선에서 북진하던 국군에 쫓겨 퇴각하던 인민군에 의해 피살당했으며, 어머니는 함경남도 원산 태생으로 연희전문 4학년 때 시위 주동자로 지목돼 제적을 당했다.
김민기는 어린 시절 외로움과 공포감 속에서 성장했으며, 서울 재동초와 경기중·고를 거쳐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수배·연행·감시·군 복무·재야인사(김지하)와의 인연 등으로 입학 9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김민기는 대학 시절 동기 김영세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으며, 이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앨범을 제작하지만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청돼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다. 그는 1971년 저항시인(오늘날은 보수 묵객) 김지하와 운명적으로 만나고, 이를 통해 폰트라(Poem on Trash, 잿더미 위에 시를)와 인연을 맺는다. 그해 봄 어느 날, 김민기는 종로의 청개구리 모임에서 고교 동창 임문일의 소개로 서강대 1년생 양희은을 처음 만난다.
이때 양희은 김민기의 노래 <아침이슬>에 반하며 김민기가 찢어버린 악보를 집어들고 연습한 후 취입하게 된다. 이후 1975년 이 곡은 금지곡이 되면서 지하로 스며들고 김민기도 당국의 감시를 받는다. 이후 한동안 김민기는 자신의 노래를 다른 사람 이름으로 발표하며, <가을편지> <늙은 군인의 노래> <상복수> <작은 연못> <새벽길> 등이 그것이다. 1975년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는 계속해 감시의 눈길이 붙어 다녔고, 전북 익산으로 낙향해 농사를 짓기도 하고 청년 활동을 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다.
1991년 마침 그는 극단 '학전'을 설립하고 <겨레의 노래>를 총감독했고, 1994년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기획·연출했으며, 이후 '학전' 대표로 있다. 그는 가수·작사가·작곡가·뮤지컬기획자·싱어송라이터이지만, 시집 하나 없는 시인이고, 그림 한 장 없는 화가이며, 노래하지 않는 가수로서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지향하는 영혼을 불사르며 살아간다.
양희은은 1952년 서울에서 출생해 경기여중·고를 거쳐 서강대 1학년 때인 19세에 <아침이슬>로 데뷔했다. 이 곡은 7080세대의 민주화 운동의 상징 노래처럼 인식됐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애창했다.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된 사연은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구절이 빨갱이를 암시한다는 것. 그녀는 기도하듯 마음을 열어놓고 우러나는 감정을 진솔하게 읊어간다. <들길 따라서> <내 님의 사랑은> <일곱 송이 수선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한계령> <아름다운 날들> <내 나이 마 혼 살에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이러한 멋을 풍긴다.
1987년 6월 10일은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던 시기다. 그때 울려 퍼진 대표적인 두 곡이 <애국가>와 <아침이슬>이다. 전자는 국민적 장엄성(莊嚴性)으로, 후자는 영웅적 비극성(悲劇性)으로 참가자들에게 일체감을 준 주술(呪術) 같은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