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파병간 남진에게 가고픈 속내의 곡 이란 속설도
유 차 영
한국아랑가연구원장
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
경기대학교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책임교수
대중가요 유행가스토리텔러
<바다가 육지라면>은 1970년 남진이 파월장병(派越將兵)으로 있던 베트남으로 날아가고 싶던 조미미의 불타는 속내를 엮은 곡이라는 속설이 있다. 노래 배경지는 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신라 제30대 왕 문무대왕이 용왕으로 화(化)해 신라를 지켜주고 계신 바닷가 근처다. 이곳은 이 노래 작사가 정귀문의 고향이다. 그곳에 가면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가 하늘나라로 먼저 간 조미미를 그리워하며 서 있다.
얼마나 멀고 먼지 그리운 서울은/ 파도가 길을 막아 가고파도 못갑니다/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 아~바다가 육지 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을// 어제 온 연락선은 육지로 가는데/할 말이 하도 많아 목이 메어 못합니다/ 이 몸이 철새라면 이 몸이 철새라면/ 뱃길에 훨훨 날아 어데론지 가련만은/아~ 바다가 육지라면 이별은 없었을 것을. (가사 전문)
멀고 먼 바다, 만경창파(萬頃蒼波)를 원망하는 노래 속 화자(話者)는 사랑하는 애인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우연이었던가? 이때 남진은 바다 건너 베트남 전쟁터에 있었다. 요행인가? 이 노래보다 4년 전인 1966년에 남진은 인천 연안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바라보면서 바다를 사이에 둔 이별 노래 <가슴 아프게>를 열창 했었다. 원래 이름이 <낙도 가는 연락선>이었다. 정두수작사·박춘석작곡의 노래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도 바다를 사이에 둔 연인의 이별 사연이다. 멜로디 전주곡(前奏曲)이 연주될 때 잔잔하게 울려 퍼지던 오프닝 멘트도 가슴 저린다.
‘가면은 어서 오고 오면은 가지 말지, 구름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는 남아, 한 백년 같이 못 살 인연이라면, 섬 속에서 남몰래 자라난 꽃이라며 꺾지나 말지.’
당시 23세 조미미(본명 조미자)는 1947년 영광에서 출생해 목포여고를 졸업했으며, 1965년 동아방송에서 <떠나온 목포항>으로 데뷔했다. 선배 가수 남진과 조미미 연문설(戀文說)은 대중가요계의 골동품 같은 설담(談)이다. 둘은 동향(목포, 영광)이고, 한 살 터울(1946, 1947년생) 선후배다. 데뷔 시기(조미미 1964년, 남진 1965년)도 비슷하며, 1968년 남진의 해병대 입대와 월남 파병·파월장병 위문공연도 말꼬리의 단초가 된다. 베트남전쟁 파월장병 위문공연은 1965년 6월부터 1971년까지 83차례에 걸쳐 1,160명이 파월됐고, 2,922회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이 공연단에 조미미가 포함 됐던 것이다. 남진의 전역 후 귀국 시기에 조미미가 부른 노래 <먼데서 오신 손님>도 팬들의 이야깃거리가 될 법하다. 조미미는 제2의 이미자로 불렸다. 그녀가 서울로 와서 지구레코드를 드나들 때, 이곳의 전속가수 이미자와 이름이 같아서 미미로 예명을 지었단다. <유정천리> <대전부르스> 작곡가 김부해가 지어준 선물이다. 1965년 그녀가 데뷔한 동아방송 민요가수 선발 가요백일장은 김부자·김세레나가 같이 데뷔한 무대이며, 이후 <서산갯마을> <여자의 꿈> <선생님> 등으로 인기를 이어오던 중, <바다가 육지라면>을 통해 인기가 상승한다.
작사가 정귀문은, 1969년 봄 고향 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앞바다에서 밀려가는 파도에 마음을 실어 나르다,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서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을 수평선에 그리면서 가사를 썼단다. 2009년 그곳에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를 건립했고, 이 노래는 나훈아·김연자 등이 다시 불렀다. 조미미의 남편은 현해탄(玄海灘)을 건너 온 재일동포 야스다 에이키츠(永吉)다. 둘 사이에 두 딸을 두었으며, 그중 큰 사위는 인도네시아인 사업가다. 그녀와 결혼 후 사위는 자신의 회사 이름을 장인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녀는 서울 00제일교회에서 평생을 평신도로 살았으며, 딸은 엄마보다 직분이 한참 높은 권사였다. 동향 오빠 가수 남진은 이 교회의 장로였다. 그녀는 2012년 향년 66세, 갑자기 발견된 간암으로 2개월 투병 끝에 자택에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