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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01/25  치학신문
유차영의 아랑가 ⑮
1993년 사모곡 : 이덕상/서승일/태진아·양지은(미스트롯2)

미국에서의 고생 어머니 임종에 피를 토하는 절규

 


 유 차 영


 한국아랑가연구원장


 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


 경기대학교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책임교수


 대중가요 유행가스토리텔러

 

 

 

 <사모곡>은 이 세상 모든 자식들의 공감을 자아내는 절절한 가사와 태진아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의 목소리가 합쳐져서 남녀노소의 가슴을 후벼과, 울컥거리게 한다. 태진아는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간 지 6개월 만에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는다. 그는 <사모곡>을 부를 때, 그 어떤 시청자보다 더 애절하게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마음으로 피를 토한다. 그 절규가 대중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앞산 노을 질 때까지 호미자루 벗을 삼아/ 화전 밭 일구시고 흙에 살던 어머니/ 땀에 찌든 삼베적삼 기워 입고 살으시다/ 소쩍새 울음 따라 하늘 가신 어머니/ 그 모습 그리워서 이 한 밤을 지샙니다// 무명치마 졸라매고 새벽이슬 맞으시며/ 한평생 모진 가난 참아내신 어머니/ 자나 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며/ 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 말고 그 무엇을 바치리까// 자나 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며/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 말고 그 무엇을 바치리까. (가사 전문)


 태진아는 <사모곡>을 부를 당시 40세였다. 1953년 충북 보은군 탄부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정규 학력 가방끈은 관기초등학교 졸업이다. 19세가 되던 1972년 <내 마음 급행열차>로 가요계에 데뷔했으나 반응이 미진했으며, 1973년 <추억의 푸른 언덕>으로 이름을 알린다. 그러나 데뷔 초 간통·대마초 사건에 휘말려 방송출연을 금지당하기도 했으며, 이 사건들에 의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지만 힘든 생활을 했다. 나이트클럽에서 노래와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고, 남진의 소개로 그곳에서 현재의 아내 이옥형과 결혼했다. 그러다가 1984년 귀국해 <경아의 사랑>으로 재기를 시도했으나, 신통찮아 다시 미국으로 가서 교포를 상대로 나이트클럽에서 일했으며, 이후 귀국해 1989년 당시 최고의 작곡가 임종수에게 받은 <옥경이>(원명 <고향 여자>)로 인기를 끌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그 무렵 가요계에 거대한 바람을 몰고 온 송대관·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3인방으로 불리며 트로트 장르를 부활시키는 역할을 했다. 1990년 <거울도 안 보는 여자>를 부를때 거울이 달린 옷을 입고 노래를 했고, <미안 미안해>를 부를 때는 브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해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4년 가수 성진우의 소속사 사장으로 활약했고, 1996년 배우 김자옥을 스카우트해 가수로 데뷔시킴으로써 가수 양성에도 힘썼다. <사모곡>은 태진아의 제2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2010년에는 송대관 후임으로 제3대 대한가수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태진아는 '스타 인생극장'에서 14세에 서울로 올라와 퇴계로 4가에 있는 중국요리 집에서 종업원을 했는데, 작곡가 서승일(<사모곡> 작곡)이 자기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일을 하니까, 가수 한번 해보지 않겠냐며 제안했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직업 이 37가지나 된단다. 중국 요리집 배달·신문팔이·구두닦이 안 해본 게 없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노숙자로 지낼 때, 길 가는 사람한테 "아저씨 1,000원만 주세요. 100원만 주세요"라고 하던 것이란다.
 태진아는 장모가 아내를 항상 "옥경아"라고 불러 이름이 이옥경인 줄 알았는데, 혼인신고를 하러 가서 이옥형인 것을 알았다. 또한 아내는 태진아의 본명이 조방헌인 걸 알고 결혼했냐고 묻자 나중에 호적 등본을 보고 알았단다. 태진아는 자신의 인기 비결 노래는 부인 이름(옥형)을 딴 <옥경이>와 어머니를 목 놓아 부른 <사모곡>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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