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 만에 완성된 블루스풍 대전역 이별의 서사
유 차 영
한국아랑가연구원장
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
경기대학교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책임교수
대중가요 유행가스토리텔러
목포행 제33열차의 이별 서정, <대전부르스>. 이 노래는 서울발 목포행 완행열차가 낳은 노래다. 1959년 2월부터 1년여 간 운행된 증기열차가 노래의 모티브다. 그 당시 열차 번호가 짝수면 서울행, 홀수면 지방행이었다. 일본에서 주로 사용하는 형식인데, 우리도 흡사하다. 1959년 어느 날 밤 12시 40분경, 역 광장으로 산책을 나온 한 사내의 시선이 대전역 플랫폼 가스등 아래 맞는다. 그곳에는 청춘 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북쪽에선 남자를 싣고 갈 목포행 0시 50분 완행열차가 홈으로 들어오고, 마침내 둘은 생이별을 한다. 사내는 곧바로 여관으로 되돌아와서 이 장면을 시로 쓴다. 여기에 김부해가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블루스 선율을 얹고 신인가수 안정애의 목소리를 타고 세속으로 녹아 들어간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랫 홈/ 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발 영시 오십분/ 영원히 변치 말자 맹세했건만/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 아~보슬비에 젖어오는 목포행 완행열차. (가사 전문)
이 대전역 이별 서사를 노랫말로 얽은 사내는 최치수, 그는 당시 신세기레코드 사업부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며, 지방 출장을 위해 대전역 인근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의 가사를 받은 김부해는 블루스로 리듬을 정한 뒤 3시간이의 작업 끝에 곡을 완성해서 안정애가 녹음을 한다. 이 노래는 출반 3일 만에 주문이 쇄도했고 회사 창립 이래로 최대의 대박을 쳤다. 당시 23세 안정에(본명 안순애)는 1936년 출생해 블루스풍의 트로트로 인기를 모았으며, 이 노래가 대표 곡이다. 그녀는 1950년대 후반 고복수가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에서 이미자와 같이 노래 공부를 했으며, 고복수의 추천으로 가요계에 입문한다.
이 노래는 1963년 이종기 감독이 최무용·엄앵란·신성일을 주연으로 제작한 영화 <대전발 0시 50분)의 주제곡이 된다. 줄거리는 이렇다. 장래를 언약한 여인이 있는 주인공 육군 소위는 정식으로 약혼할 것을 독촉받는다. 하지만 그는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누님을 찾은 뒤에 약혼식을 올리기를 희망하며 하루하루 미룬다. 그러던 어느 날 어렵게 누님을 만나지만, 그 누님이 삼류 화류계 바 여급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때 그에게 전방 수색대 임무가 떨어지는데, 그는 세상을 비관하며 죽음으로써 수색정찰 임무를 완수한다.
1959년 2월 제33열차로 탄생한 이 증기기관 기차는 밤 8시 45분에 서울을 출발, 대전에 0시 40분 도착, 다시 목포를 향해 0시 50분에 출발했다. 지금은 서대전역을 통해 호남선이 다니지만 당시에는 대전역을 거쳐 갔다. 이 열차를 이용한 사람들은 대전역인근 시장에서 광주리 물건을 팔던 농사꾼이거나 술에 얼큰히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지방 사람들이었다. 이 열차는 지금은 없다. 생긴 지 1년 만인 1960년 2월 대전발 03시 05분 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을 다했다. 작사·작곡가는 이후 레코드사까지 운영을 했지만 지금은 고인이 됐다. 그러나 아직도 대전역 부근 허름한 선술집에서는 쉰 목소리의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역사 속 통속의 연결 고리다.
대전은 1905년 경부선 개통으로 대도시화가 되며, 1912년 호남선이 개통하면서 교동의 요충지로 발전했다. 대전시 동구 소제동 철도 관사촌은 대전 철도 역사의 현장이다. 1930년대 일본인 철도 기술자들의 숙소로 조성된 이곳은 현재 40채 정도가 남아 있다.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에 지어진 관사촌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다. 서울 신용산의 명칭도 조선총독부 철도국 소속 일본인 직원들의 숙소를 지으면서 붙여진 이름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얼마 전 대전역 광장에 있던 <대전부르스> 노래비가 철거됐다. 새칭 유명 인사들의 유적비 건립이 유행 바이러스처럼 전국으로 번져가는 트렌드와는 상반된 현상이다. 이 노래비는 1999년 철도 창설 100주년과 <대전부르스> 발표 40년을 맞아 우송대학교 협찬으로 건립됐었다. 관리 부실과 노숙자들의 폐행이 명목상의 철거 이유지만, 내면적으로는 노래를 부른 가수 이름 색인을 놓고 10여 년째 가수와 추진위원회 측이 대립해온 내홍이 있었다. 최초 발표 가수와 리메이커 가수 이름 색인과 관련한 상반된 견해가 원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