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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03/14  치학신문
유차영의 아랑가 ⑱
1961년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 손석우/손석우/한명숙

1961년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 손석우/손석우/한명숙


직유화법 스윙리듬으로 동남아 일본에서도 큰 인기

 


 유 차 영


 한국아랑가연구원장


 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


 경기대학교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책임교수


 대중가요 유행가스토리텔러

 

 

 1961년 우리나라 대중음악계는 '노오란' 색으로 물들었다. '노란'색이 아니라 '노오란' 색으로. 노랫말 중의 이런 '오' 자를 장식음(裝飾音)이라고 한다. 정치·사회가 소총 개머리판과 군홧발에 위협을 받던 시기다. 손석우(1920-2019)는 이런 시류(時流)를 외면한 듯, 팝(스탠더드 팝) 스타일 노래를 만들어서 엔카장 트로트 물결이 넘실거리던 대중가요계에 새로운 유행다리를 건설했다. 시냇물로 치면 징검다리, 강물로 치면 교량(橋梁)이었다. 대중문화예술로 치면 감성의 포장도로를 닦았다.


 노오란 샤쓰 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 그이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이 쏠려/ 아~ 야릇한 마음 처음 느껴본 심정/ 아~ 그이도 나를 좋아하고 계실까/ 노오란 샤쓰 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어떤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아~ 야릇한 마음 처음 느껴본 심정/ 아~ 그이도 나를 좋아하고 계실까/노오란 샤쓰 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가사 전문)


 노랫말도 은유에서 직유화법 화자(話者)를 등장시킨다. 여성 화자는 '노오란 색 샤쓰'를 입은 사나이의 겉모습에 반하지만 차츰 내면의 동요를 일으킨다. 노래는 이 상황을 산문 읽어가듯 이어가고, 멜로디는 2/2 박자 스윙 리듬(swing rhythm), 선율은 미국의 컨트리 송(country song)과 힐빌리(hilbilly)를 본떴다. 이 곡은 1962년 같은 이름의 영화로 제작됐고, 이후 프랑스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Yvette Giraud, 본명 이베트 우롱 Yvette Houron, 애칭은 마드무아젤 오르탕지아 Mademoiselle Hortensia, 1916~2014, 프랑스 여성 가수 겸 작사가)가 서울시민회관에서 우리말로 불러 인기를 모았다. 이어 프랑스어판 음반도 취입한다. 이후 동남아시아와 일본 가요계에서 유행 했고, 1970년대 이성애가 일본에서 리바이벌해 인기를 얻었다.
 1962년 엄신호가 감독하고 신영균과 엄앵란이 주연한 영화 <노란 샤쓰의 사나이>속 주인공 남자는 늘 노란 셔츠를 입고 다닌다. 그러면서 뭇 여성들에게 인기를 누리다가 결국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한다. 우리나라 로맨틱 코미디 장르 영화의 원조 격이다. 영화 속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피앙세는 여학교 체육 선생님이었다. 1962년 국도극장에서 개봉된 후 무려 10만 관객을 동원했고, 가수 한명숙이 영화배우로 거듭난다.
 노래를 만든 손석우(孫夕友, 1920~2019) 선생은 전남 장흥 출신이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이 진주 수곡면 손경례 집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장을 받고(1597년 8월 3일) 800리 길을 걸어가면서 조선 수군을 재건했던 마지막 장소 회령포가 있는 곳이 장흥이다. 손석우는 김대중 대통령과 목포상고 동문 이다. 목포 호남은행에서 근무하다가 1941년 작곡가 김해송(KPK악극단장, 이난영 남편) 소개로 조선연예주식회사에서 기타 연주자를 시작한다. 이후 1957년 영화 <청실 홍실>로 영화음악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그는 2011년 대중가요 프로젝트 '춘하추동' 운영자에게 글을 보낸다. '샤쓰'는 일본식 용어이지만, 우리말 사전에 있는 것이라서 사용한 것이고, '노오란'은 멜로디 가락에 맞춘 감흥을 위한 것이라고. 또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로 알려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당시 KBS 노래자랑 공개방송 아나운서 임권택이 이렇게 사용한 것이 시발(始發)일 것으로, 또한 영화 제목의 영향일 것으로 언급 했다.
 1935년 진남포에서 출생해 용강에서 성장한 한명숙은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다가 6·25전쟁 중 인천으로 피란했다. 16세였다. 그 후 인천 태양악극단에서 활동한다. 평양대 음대 교수였던 외삼촌 제자가 다리를 놓아준 덕분에 이루어진 새 출발이었다
 18세(1952)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인 인천 애관극장(愛館劇場) 무대에 오르며 가수 활동을 시작한다. 이어서 19세에 미8군 무대 진출, 그로부터 8년 뒤에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대히트시켰다. 허스키 보이스와 팝 스타일의 멜로디가 주효했다. 1956년경부터 손석우는 새로운 장르의 곡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청실홍실> <나 하나의 사랑> 등이 팝(스탠더드 팝)의 예다. 이것의 변곡점(變曲點)이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이고, 이후 이봉조·김인배·길옥윤 등으로 이어졌으며, 가수도 최희준·한명숙·현미·패티김 등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트렌드는 배호·이미자·나훈아·남진으로 이어지는 오디오형과 비디오형 트로트 인기 산맥에 부딪쳐 갔고,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권위와 낭만의 충돌기까지 이어진다. 그 절정은 1975년 해피스모그 사건, 대마초 파동과 대중가요 학살로 획을 긋는다.
 한명숙의 부군(夫君, 남편)은 6·25전쟁 참전 베테랑 국가유공자, 예비역 육군 상사다. 둘 사이의 큰 아들이 이명훈의 <내 사랑 영아>를 작곡한 드러머 겸 작곡가 이일권 이다. 그녀는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이후 <사랑의 송가> <그리운 얼굴> <비련 10년> 등을 발표하지만 인기는 여의치 못했다. 1970년대에는 이혼의 아픔을 겪고, 성대 결절 수술도 하면서 인기는 퇴조(退潮)한다.
 당시 우리나라 대중가수 등용문(登龍門)은 미8군 무대였다. 6·25전쟁 이후 미군은 우리나라에 대급(除級, 200명 정도 내외의 단위부대) 기준으로 300여 곳에 10만여 명이 주둔했다. 이들에게 위문공연을 펼치던 주체가 미8군 무대다. 이 무대는 미국인 전문가 7명에 의한 오디션 테스트를 거쳐서 선발했고, 1년에 2회 실시했다. 이와 연계해 중계업자가 등장하는데, 화양·유니버설·삼진·아주·동엽 등이 등록된 단체들이었다. 이 오디션에 통과한 사람은 AA·A·B·C급으로 분류됐고, 매일 오후 3시경에 회사에 모여서 전국의 미군 클립으로 보내졌다. 대중가요계의 불멸의 디바 패티김(1938~, 본명 김혜자)이 이 오디션에서 A+를 받았다. 등외 특등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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