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여곡 발표한 3천만의 연인 꾀고리 가수 박재란
유 차 영
한국아랑가연구원장
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
경기대학교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책임교수
대중가요 유행가스토리텔러
1960년대 여가수 3인방 하면 박재란·한명숙(<노오란 샤쓰의 사나이>)·현미(<밤안개>)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1960~1970년대 가요계 여걸 삼총사다. 최숙자·이미자·패티김이 있었지만 그들은 인기 서막을 치장하던 시절이라고 함이 옳으리라. 그중 박재란은 3천만의 연인, 꾀꼬리 가수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별명을 가진 박재란(1938~, 본명 이영숙)이 <님, 창살 없는 감옥>의 목소리 주인이다.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 왜 이리 그리운지 보고 싶은지/ 못 맺을 운명 속에 몸부림치는/ 병들은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서로 만나 헤어진 이별이건만/ 맺지 못할 운명인걸 어이 하려나/ 쓰라린 내 가슴은 눈물에 젖어/ 애달피 울어봐도 맺지 못할걸/ 차라리 잊어야지 잊어야 하나. (가사 전문)
이 노래는 강범구 감독, 황해·이경희 주연으로 1963년 제작된 영화 <창살 없는 감옥>의 주제곡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실수로 범하게 된 살인 때문에 죽을 때까지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심정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주제가는 당시 26세 박재란이 부른 이 노래이고, 삽입곡으로 백설희의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이 흘렀는데, 1964년 이 영화가 대만으로 수출돼 백설희의 삽입곡이 대만에서 크게 히트했다.
박재란(본명 이영숙)은 1938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던 아버지 이수천과 성가대원이던 이머니 유순남 사이의 1남 5녀 중 4녀로 세상을 만난 것이다. 4세때 철도국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전근돼 가족 모두 천안으로 이사했으며, 6·25전쟁 중이던 초등학교 시절 그녀의 나이 10세 때 부친을 여읜다. 초중고를 거치면서 단연 남달랐던 박재란은 16세 때 무대에 첫발을 디딘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활동을 권유한 인물이 당시 인천 경찰악대장 박태준(1901-1986, <오빠생각>작곡가)이다. 그의 추천을 통해서 6·25전쟁 이후 육군본부 산하 군예대(KAS)에 발탁돼 활동도 한다. 6·25전쟁 이전부터 유사하게 존재했던 이 군예대(軍藝隊)의 창설과 활동에 대한 설은 분분하다.
6·25전쟁 이전은 여순사건(1948)과 지리산 공비 귀순 유도 활동을 위한 특별선무 공작대를 근거로 하며, 이들이 6·25전쟁 군예대의 전신이라고 한다. 1950~1951년 6·25전쟁의 화염 속에서 충주 창단설·대구 창단설·제주 창단설이 혼무한데, 대구설은 최남용이 육군본부 휼병감실(恤兵監室) 소속 군예대(KAS)를 조직해 정훈공작대 기획실장도 겸했었기 때문이다. 1950년 7월 충주 지역 주둔 6사단 소속으로 출범했다는 설도 있으니, 정밀하게 살필 과거다.
6·25전쟁 중 육군본부가 있던 대구(한국은행 대구지점 자리)에서 설립한 군예대 (KAS)는 연극계 원로 박진(1905~1974)이 고문, 변형두 소령이 대장이었으며, 실제 리더는 북간도 용정 출신 박호(1921~?)였단다. 이 군예대원들은 6·25전쟁 당시 군용 트럭을 이용해 전선의 부대를 위문공연했다. 참가 연예인은 안다성·송달협·고대원·유춘산·임노설·손인호·박시춘·남인수·허장강·이예춘·김진규·백설희·박노식·김진걸·이매방·황해·독고성 등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수양아버지까지 되어준 박태준(전 포항제철 회장 아님)으로부터 받은 예명이 박재란이다. 그녀가 대구에서 발표한 노래는 나화랑 작곡의 <뜰아래 귀뚜라미>와 김학송 작곡의 <코스모스 사랑>인데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후 악극단으로 자리를 옮겨 첫 히트 곡 <럭키모닝>이 발표될 때까지 무명으로 희망악극단·무궁화악극단·반도악극단 등을 옮겨가며 무대 활동을 계속한다. 이때 이름도 알려지고 인기도 상승한다.
박재란은 1957년 데뷔 후 1천여 곡을 발표하는 활동을 하다가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의 밤무대에 선다. 하지만 불법 체류자로 지목돼 귀국을 하고 신림동 고시촌에서 하숙생 신세로 한참을 살다가 이후 안산의 개신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권사로 살아간다. 그녀는 대중가요를 다시 하고 싶지는 않지만 무대에 서서 자신만의 콘서트를 열어보고픈 소망을 가지고 있단다. 여든을 넘긴 그녀는 자신의 인생길을 돌아본 자서전 같은 책 <<산 너머 남촌에는>>을 출간하기도 했다. 1958년 그녀가 불러 히트를 한 노래 <산 너머 남촌에는>과 같은 제목인데, 파인 김동환의 시에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김동현이 멜로디를 엮은, 시(詩)가 대중가요로 화(化)한 노래다.
<님, 창살 없는 감옥>은 작사가 차경철이 1958년에 군에 입대하기 전날 밤에 머리를 쥐어짜면서 마무리한 노래다. 가사를 마무리하고 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머리를 싸매며 완성해 도미도레코드 한복남에게 보내고 다음 날 입대를 한다. 그가 병장 계급장을 달고 있을 때 박재란이 그 부대에 위문공연을 간다. 노래를 부르던 박재란은 "이번에 신곡을 발표했습니다. 제목은 <님, 창살 없는 감옥>이에요." 하고 노래를 부른 후, "이 곡의 작사가는 이 부대에 계시는 차경철 병장님이세요. 차경철 병장님! 혹시 이자 리에 계세요?"라고 했던 사연도 품고 있다.
박재란의 딸 박성신(1968-2014)도 대중가수였다. 그녀의 배우자는 개신교 목회자 임인성, 가수 나애심의 딸 김해림과 절친이던 박성신은 서울예술전문대학 1학년 때인 1987년 제1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희상>으로 입상해 데뷔한다. 1988년에는 제9회 MBC 강변가요제에서 <비 오는 오후>로 가창상과 장려상을 받았다. 대표곡인 <한 번만 더>는 핑클·마야·나얼·이승기 등이 리메이크했다. 그녀는 2014년 8월 8일 심장 질환으로 돌연사했고, 향년 45세였다. 76세, 어머니 박재란(이영숙)을 뒤에 두고 하늘 여행을 먼저 떠났다.